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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쉬엄쉬엄

by 이우기, yiwoogi 2020. 3. 14.

 

‘쉬엄쉬엄’, ‘쉬어 가며 천천히 길을 가거나 일을 하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유자적, 안분지족, 행운유수’ 이런 말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동기 모임 산악회 이름을 ‘쉬엄쉬엄산악회’라고 한 건, 앞을 향하여 바쁘게 달려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이제는 좀 쉬엄쉬엄 걸어가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것이리라. 빠른 속도로 뛰지 않아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진리를 깨달았음인지 파랑새 같은 행운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니 현재에 충실하며 만족하면서 살자는 것을 득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토요일마다 아침에 모인다. 어떤 날은 7시쯤, 어떤 날은 8시쯤 모인다. 모이는 곳은 늘 같다. 신안동 공설운동장 근처 언니콩나물해장국(055-742-5399)이다. 고등학교 동기가 운영하는 해장국집이다. 이른아침부터 점심나절까지만 장사한다. 손님이 많고 대부분 단골이다. 얼핏 보면 별것 아닌 콩나물해장국처럼 보이지만 한 숟갈 떠 먹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된다. 깍두기ㆍ배추김치ㆍ모두부 따위 몇 가지 반찬도 깔끔하고 단정하다. 불금을 보낸 친구는 해장으로 한잔하고 곧 이어질 산행을 대비하는 친구는 자동차 주유하듯 한잔 한다.

 

해장국집에서 콩나물해장국으로 속을 데우고 달랜 다음 진주 근처 야트막한 산을 오른다. 많이 모일 때는 10명쯤 되고 적을 때는 3명도 간다. 주마다 알뜰히 챙기는 친구 덕분이고 그럴 때마다 반갑게 손 번쩍 드는 친구들의 의리 덕분이다. 친구들 이름 대신 별명을 지어 붙여주는 재미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나는 해장국 먹으러 두 번 참석했고 산에는 한번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긴 하지만, 친구들에겐 미안하게 됐다.

 

진주시 명석면에 있는 광제산, 진양호에서 희망교에 이르는 칠봉산, 진양호에서 명석으로 가는 양마산, 금산면에 있는 국사봉 들을 두루 섭렵하고 비오는 날엔 진주 남강에 내리는 안개 따라 정처없이 걷는 듯하다가 유수리 어디 농장에 들렀는데 거긴 또한 친구의 블루베리 농장이었던 것이다. 사천시 와룡산을 올라가는 지금쯤 그들은 장딴지 팽팽하게 들어찬 근육을 느끼며, 지나온 54년 세월의 무게를 잠시 잊지나 않을까. 전문 산꾼 같은 친구들, 왕초보 같은 산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란도란 두런두런 희희낙락 추억을 삼키고나 있지 않을까.

 

토요일마다 가벼운 배낭 메고 등산화 끈 조여서 집을 나서는 친구들의 환한 웃음이 떠오른다. 산을 오르면서 등줄기와 콧잔등에 흐르는 땀을 느끼는 그 기분을 알 듯하다. 지난 한 주 동안 몸에 찌든 알코올과 머리에 들어앉은 스트레스를 자연 속에 잠시 풀어놓는 여유가 부럽다. 산은 산이라서 좋고 산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은 들판이라서 좋고 어쩌다 바다도 보이는 곳에서라면 더없이 좋았을 것 아닌가. 거기가 어디면 어떻고 날씨가 어떠하면 또 어떤가. 친구들 별명 부르는 재미,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별명 기억해내는 재미, 그리고, 내려와서 하산주 한잔 할 생각에 다셔지는 입맛까지.

 

쉬엄쉬엄산악회를 이끄는 친구 함께하는 친구들 모두 늘 건강하길 빈다. 아침 해장국이라도 먹으러 종종 참석해 지난 등산의 추억과 다가올 산행의 설렘을 곁에서 좀 얻어먹어야겠다. 간이 꼭 알맞아서 무척 맛있고 아삭아삭하면서도 묵지근한 콩나물이 더욱 맛있는 그 해장국도 장복해야겠다. 단성막걸리도 빼놓을 수 없겠지. 그렇게 쉬엄쉬엄 익어가는 나이들이 됐으니….

 

2020. 3. 14.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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