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부터 한여름 소나기처럼 내리던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10시 넘어 하동으로 향했다. 하동 가는 길은 늘 정겹다. 느리다. 아름답다. 아기자기하다. 오밀조밀하다. 눈길 가는 곳마다 매화가 피었다. 흰 매화, 붉은 매화, 푸른 매화 들이 들판과 산을 물들였다. 촉촉히 젖은 도로와 논과 밭과 나무들이 봄기운으로 가득하다. 차들은 느릿느릿 걸었다. 횡천에 가는 길이다.
횡천은 조선 현종 때 군소재지이기도 했는데, 주요 도로가 사통팔달 뚫려 있다. 도인촌으로 유명한 ‘청학동(靑鶴洞)’ 가는 관문이다. 참게, 다슬기 등으로 유명한 청정 1급수 횡천강이 흐른다. 요즘은 미나리 주산지로 온 나라에 이름이 높다. 횡천에서는 2017년부터 해마다 3월초부터 18일간 ‘하동 청학 미나리축제’를 연다. 올해는 열지 않는다.
다음은 지난해 하동 청학 미나리축제 때 하동군이 내놓은 보도자료의 일부 내용이다.
하동 청학 미나리는 2019년 현재 21농가가 남산리 일원 7.5㏊의 미나리 밭에서 연간 150여t의 미나리를 생산해 10억 50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특히 청학 미나리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횡천강 인근 지역에서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무공해로 재배돼 깨끗하고 향이 짙으며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미나리는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생으로 먹거나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좋고, 국이나 탕에 넣어 먹기도 하는 등 요리법이 다양하다. 한방에서 ‘수근(水芹)’이라 불리는 미나리는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혈관계 질환 예방과 혈액정화에 효능이 있으며, 가슴 답답함과 갈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의보감>에 미나리가 해독작용에 탁월하다고 기록돼 있는데 미세먼지, 흡연, 건축자재 등으로 몸속에 들어온 중금속이나 독성성분을 흡수해 몸 밖으로 배출하는 효능도 있다. 그 외에 음주 후 숙취 해소에 좋고, 간장 질환 완화와 신장기능 증진에 효과가 있으며 이뇨, 항염 작용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횡천에 가는 까닭은 이순수 형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아니다. 이순수 형이 키워 파는 미나리를 사기 위해서다. 아니다. 이것을 핑계로 봄꽃들이 흥성흥성 잔치를 벌이는 하동 국도를 눈으로 마음으로 즐겨보기 위해서다. 눈에 담기고 마음에 쏠린 하동의 봄을 미나리를 매개로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다.
이순수 형이 고향 마을에서 동네 어른들을 믿고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건 2년 전이다. 그 전에는 매실을 팔았다. 곶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던 적도 있다. 꿩을 키워 판 적도 있고. 철철이 찾아드는 지인을 위해 횡천강에 투망도 던졌다. 내가 보기엔 그 모든 것을 에멜무지로 하는 것이어서 소득은 많지 않았다. 이장을 맡아 동네 아지매의 신임을 많이 받은 것은 횡천면사(橫川面史)에 정확하게 기록되겠지.
2019년 3월 9일 나는 극단 큰들의 명작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 보러 하동 최참판댁에 갔다. 너른 악양들판에 피어난 매화 향기에 취하여 정신이 어질어질하던 때다. 1시간 동안 마당극의 재미에 푹 빠진 날이다. 새봄을 맞이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마당극 공연 행진에 몸을 맡긴 기억이 새롭다. 돌아오는 길에 횡천에 들렀다. 형에게 미나리 몇 상자 샀다. 그중 한 상자는 사천 완사에 있던 큰들 사무실에 갖다 드렸다. 문 앞에 살짝 떨궈놓고 오려다가 큰들 식구들에게 들켜 차 한 잔 얻어먹었다. 그런 기억이 있는 날이다.
2020년 3월 7일 다시 하동으로 가는 것은 1년 전 추억을 마주하고 싶었던 마음속 굴뚝 연기 때문이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추억의 감미로움이 나를 하동으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극단 큰들의 마당극은 볼 수 없었다. ‘코로나19’라는 역병이 창궐하여 모든 공연을 없애거나 미룬 탓이다. 비록 공연은 못 보더라도 미나리를 사서 나도 먹고 큰들에도 갖다주고 멀리 처갓댁에도 좀 보내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큰들은 사천 완사에서 산청 내수리로 옮겨 갔으니 하루 만에 하동과 산청의 봄내음을 함께 마셔보자 하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형은 애써 키운 미나리 판로가 막혀 난감한 표정이었다. 하동 청학 미나리축제가 열렸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백화점, 마트 등에 손님이 많았더라면 좀 나았을 것을. 꽃피는 하동을 찾는 관광객이 많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을. 모든 조건은 불리했다. 지난해보다 더 잘 자란 미나리가 외려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형의 딸 누리가 네이버에 누리방(블로그; https://blog.naver.com/hobak2433/221834196196)을 만든 것은 머리 좋고 효심 깊은 딸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 여건이 녹록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누리는 누리방에 이렇게 썼다. “탑마트에 공급되는 특상품의 미나리이며, 신선하고 향긋합니다. 타 미나리와 달리 줄기가 굵고 튼실하여 더 아삭아삭합니다.” 또 이렇게 썼다.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봄이지만, 주문하시는 분들 모두 미나리로 봄의 향긋함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한마디 더 보탰다. “지리산 암반 청정수로 키운 무농약 청정 미나리. 그날 채취해서 바로 직송 판매합니다. 냉장고에 보관하시면 2주 동안 싱싱하게 드실 수 있습니다.” 야물딱지다는 말은 이런 딸에게 쓰는 말 같다.
가는 길에 일하는 할매들 요기라도 될까 싶어 김밥을 몇 줄 샀다. 이건 내 선물이다. 형은 삼겹살 좀 사오라고 부탁했다. 이건 형이 할매들에게 드릴 점심 반찬이다. 몇 상자 차에 싣고 값을 치렀다. 선 채로 인사 몇 마디 나누고 돌아서 왔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비는 온 세상을 적셨다. 비는 음악처럼 내렸고 노래처럼 흘렀다. 하동 오가는 길은 늘 그렇다.
점심 먹은 후 산청 가는 국도에 올랐다. 산청 가는 길이나 하동 가는 길이나 똑같다. 하동 가는 길이 2차로이고 산청 가는 길이 4차로라는 건 다른 점이다. 산청군 산청읍 내수리 ‘산청마당극마을’로 가는 길이다. 전국에서 마당극을 가장 잘 하는, 아니지, 전 세계에서 마당극을 가장 잘하는 극단 큰들이 지난해 10월 둥지 튼 곳이다. 하동 미나리 4kg 한 상자 전해주기 위해 나는 차를 달렸다. 이게 뭐라고...
점심 먹고 마실 나오던 이규희 대표 가족과 만났다. 진은주 기획실장은 동네 어귀에서 운동 같은 봄나들이하다가 돌아왔다. 우리는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천왕봉 쪽을 바라보았다. 운무가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산을 적시고 논밭을 적신 뒤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마당극 마을은 조용했다. 이따금 나들이 가거나 구경 오는 차들이 왔다 갔다 했지만, 비오는 어느 봄날 오후의 마을 정경은 차분했다. 역병 코로나19 때문에 공연과 강습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어 부쩍 늘어난 여유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여유는 느긋하고 무관심한 것인데, 마당극 마을에 가득한 올 봄의 여유는 조금 안타까운 것이다. 하루빨리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기를 빈다. 마당판에서 신명나게 뛰어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큰들 배우들에게 밝고 따스한 햇살이 포근히 찾아들기를 빈다.
하동 미나리 한 상자가 눅눅해진 마음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으로 단원과 가족 40여 명이 배부르게 먹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사천에서 하동으로 공연 다니던 길, 그 어느 지점에서 자라던 봄미나리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껴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정태국 단원 부모님이 가져다 주신 돼지고기 구워 먹을 때 그 풍미를 조금이라도 더 높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다시 마당판으로 공연 갈 때까지 모두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 뿐이다. “횡천이면 가로내네요.”라던 진은주 실장의 말을 되새기며 내려왔다. 가로횡(橫), 내천(川)이라.... 마당극마을이 있는 ‘내수리’는 ‘물안내’이다...
극단 큰들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코로나19의 파장이 크네요.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해야할 큰들도 아직은 잠시 대기 중입니다ㅠ. 코로나도 잘 지나가고 봄이 제대로 무르익은 어느 좋은 날 설레게 즐겁게 만날 그날을 기다립니다.” 또한 이렇게 썼다. “오늘은 전 단원이 모여서 마당극마을에 녹차 씨앗 심었어요.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싹을 살짝 틔워서 오늘 심었습니다. 담장 따라 한 줄로 300m 이상 심었습니다.” 희망이라고 불러주고픈 녹차 떡잎을 기다린다. 떡잎이 자라 가지가 되고 잎이 무성해지듯, 큰들 식구가 되기 위해 새로 등장한 민서 씨와 태광 씨에게, 마당극 마을 첫 아기인 세아에게 올 봄이 멋진 봄, 꽃 피는 봄, 아름다운 봄으로 기억되기를 빈다.
이런 말은 좀 슬프다. “페이스북 친구분들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혹시 주변에 아르바이트 자리 있을까요? 큰들 단원 20명 정도 인원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자리 없을까요? 일거리를 저희 마당극마을로 가져와서 할 수 있는 그런 일이라면 더욱 좋겠는데ㅜㅜ 어디 없을까요? 문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단원이 옹기종기 모여 유쾌하게 떠들면서 신나게 일하고 돈도 벌 수 있는 일이 밀려들었으면 좋겠다. 이런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쉽고 미안타.
오후 4시에 큰형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하동으로 출발하면서 기별을 해둔 덕분이다. 옥봉 본가 어머니는 내가 모셨다. 어머니는 아들들 모이면 주시려고 알타리김치를 담갔다. 물김치는 한솥 가득이다. 멸치도 볶았다. 쌈 싸 먹으려고 논개시장에서 취나물도 샀다. 아무것도 하시지 말라고 해도 아직 몸 움직일 수 있으니 뭐라도 하고 싶고 해주고 싶으시다. 동생 가족도 왔다. 명지대 축구 선수 조카도 개학이 미뤄지는 바람에 함께했다. 큰형의 아들 둘은 직장인인데 용케 시간이 잘 맞았다. 창원 작은형 가족 외 모두 모였다. 미나리 덕분에 모두 모였다. 큰형 덕분에 모두 모였다. 형님과 형수는 다양한 야채를 미리 준비했다. 오리고기 몇 마리도 사놨고 술도 냉장고에 많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한 상을 차렸고, 조카들은 그들끼리 맨바닥에 불판을 폈다. 불을 올리고 오리고기를 구웠다. 미나리, 취나물, 상추, 깻잎을 한 손에 얹고 고기를 얹었다. 매운 고추를 포개고 쌈장을 발랐다. 극단 큰들에서 준 맥주와 소주를 탔다. 명석 막걸리를 부었다. 술은 각자 취향대로다. 온 가족이 시끌시끌 벅적벅적 떠들었다. 동생은 구운 고기를 어머니 앞에부터 놓았다. 손이 잘 닿지 않는 형수들 앞에도 놓았다. 조카들은 자기들끼리 고기 굽고 술 마시다가 냉장고에 있는 무엇 가져오라고 하면 냉큼 일어선다. 술이 모자라다, 고기가 모자라다며 심부름 시키면 두 말 않고 갔다 온다.
미나리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미나리 줄기를 된장에 살짝 찍어 씹는다. 물기가 입안에 퍼진다. 미나리 향기는 익히 잘 알던 것이지만,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고기와 함께 먹으니 그 맛이 배가된다. 형수는 미나리 나물도 내놓는다. 그사이에 뚝딱뚝딱 척척 잘도 해낸다. 고소하고 짭잘하고 물컹하고 졸깃거리는 미나리 나물은 이맘때 더욱 맛있다. 일품 반찬이고 최고 안주다. 하동 지리산 청학동 시원한 바람과 횡천강 맑은 물이 만나 이순수 미나리를 만들었다. 이름만큼이나 순수한 한 사내의 꿈과 땀과 웃음이 미나리향을 보듬었다. 큰형님 집 거실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3월 어느 주말 오후는 그렇게 퍼져 나갔다.
3월 8일 일요일 점심은 내가 차렸다. 미나리 밑둥은 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 윗부분은 삼겹살김치찜에 얹었다. 그 위 이파리는 달걀을 풀어 전으로 부쳤다. 오전에 학교 가서 몇 가지 일을 하고 돌아왔던지라 배가 고팠다. 미나리 3총사로 배를 채웠다. 봄으로 배를 채웠다. 향기로 마음을 채웠다. 든든하고 좋다. 미나리로 추억을 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횡천 미나리 사기를 잘한 것 같다. 신의 한 수다.
2020. 3. 8.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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