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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2019년 나에게 일어난 일 여섯 가지

by 이우기, yiwoogi 2019. 12. 31.

1. 15년 살던 집을 이사하다

 

20046월부터 15년 가까이 살던 집을 옮겼다. 국제아파트는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사 전날 내일 새벽에 이삿짐 실은 차가 들어올 것이니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붙인 전단을 돌아서니 떼어버리던 곳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공놀이하는 소리도 시끄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위층과는 앙숙이 됐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부부싸움을 참다 참다 못 견디고 경찰에 신고했다. 위층 베란다에서 물이 새어들어 우리집 안방 천장까지 적셨는데도 자기 책임 없다고 잡아떼던 사람이다. 길 가다 만날까 봐 겁난다. 무서운 게 아니라 가라앉았던 체증이 올라올까 싶어서이다. 거기 살면서 경상대 홍보실 직원으로 무사히 견뎠고 아내는 수없는 부업거리를 찾았으며 아들은 촉석초등, 대아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고마운 집이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는 집이다.

 

새로 옮겨간 집 역시 변두리다. 나불천 건너 25층 이현웰가가 보인다. 그 옆으로 석갑산, 숙호산이 보인다. 고속도로나 국도로 나서기에 좋다. 내가 다니고 아들도 다닌 대아고등학교가 보인다. 부근에 식당 같은 편의시설이 별로 없다. 병원은 하나 있는데 약국이 붙어 있지 않아 별로다. 지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마침 신혼부부가 새 단장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집이어서 새집 같다. 햇볕이 잘 든다. 이웃도 좋다. 419일 이사했으니 아홉 달도 되지 않았다. 거실에 책장을 짜 맞췄다. 새 책 사서 헌책 만드는 게 취미인 나로서는 가장 마음에 든다. 안방 장롱도 붙박이로 넣었다. 비싼 건 아니라도 사용하기엔 좋다. 집 구하고 계약하고 이사하고 청소하고 정리하는 모든 일을 아내가 다 했다. 나는 구경하고 시비 걸고 밥 사는 일만 했다. 집들이는 어머니와 형님과 동생을 초청하여 조촐하게 했다. 직장인 경상대 동료 대표, 새로 이사 간 이현동 주민 대표, 원래 살던 신안동 주민 대표 한 분씩 초청하여 술 한잔했다. 그 뒤 이래저래 놀러오는 분이 제법 생겼다. 여기서 짧게는 5, 길게는 10년쯤 살 생각이다. 아들이 졸업하고 취업해 나가면 더 좁은 집으로, 더 시골로 옮겨갈 생각이다.

 

2. 극단 큰들 마당극을 39회 관람하다

 

2018년에 시작한 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가기는 올해도 이어졌다. 극단 큰들은 마당극을 올해 모두 104회 공연했는데 그중 39회 관람했다. 37.5%를 함께했다. 산청 목화장터에서 펼쳐진 풍물놀이와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서 열린 연말 강연+공연까지 합하면 41회가 된다. 전체 관람 현황을 표로 만들어 놓고 보니 스스로 대견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 관람은 31일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열린 31100주년 특별공연이었다. 맨 마지막 관람은 1123일 경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진주아이쿱생협 조합원한마당 행사였다. 12월에도 10여 차례 공연이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맞지 않았다.

 

1년 동안 산청 동의보감촌, 산청 한방약초축제장, 산청 생초국제조각공원, 산청 선비문화연구원, 하동 평사리, 하동 화개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사천 문화예술회관, 남해 스포츠파크, 진주 경남도문화예술회관, 대아고 교정, 경남과기대에서도 보았다. 덕분에 하동 고소산성, 산청 왕산, 필봉 등지를 등산했다. 공연장 주변 관광지를 많이 걸었다. 운동이 따로 없다. 아내는 13번 함께 갔고 어머니와 친구 분들, 큰형님 내외, 동네 형님과 누나와 동생들, 이웃사촌들을 모시고 갔다.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극단 큰들과 좋은 인연 덕분에 큰들이 산청군 산청읍 내수리에 마당극 마을을 조성하고 그 준공식 행사를 할 때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다. 가문의 영광이다.

 

20181년 동안 마당극 공연을 보고 쓴 후기를 모아 책으로 냈다. <마당극에 미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누리방(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을 이리저리 붙이고 가르고 하여 350쪽이나 되는 책을 낸 것이다. 정식 출간은 아니다. 그저 복사점에서 인쇄하여 제본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다시없을 보물이다. 2019년판도 만든다. 20191231일 현재 원고를 모아놓고 교정을 하고 있다. 26꼭지 글을 글 쓴 순서대로 편집하는 중이다. 1월 중순께 완료하는 게 목표다. 지난해 나온 <마당극에 미치다>와 비슷한 분량이 될 것이다.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마당극에 빠지다>로 할까 싶다. 2018년과 2019년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큰들 마당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증명해줄 것이다. 2020년에도 이런 즐거움과 행복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고마워요~ 큰들!

 

3. 치아 임플란트 수술을 완료하다

 

흔히 치아가 좋지 않은 사람을 일러 입 안에 승용차 한 대를 물고 다닌다.”라고 한다. 치과 치료를 다 하려면 차 한 대 값은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20181월에 시작하여 20198월까지 장장 18개월 동안 임플란트 10개 수술을 했다. 힘들고 괴롭고 무서웠다. 하지만 어금니가 흔들리고 피나고 아픈 나날에 견주면 조족지혈이다. 비용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작은 승용차 한 대 값은 충분히 썼다. 실력과 인품을 고루 갖춘 의사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고 친절하기로는 1등으로 칠 만한 간호사를 만난 건 더 큰 행복이었다.

 

임플란트 수술이 모두 끝난 건 8월 어느 날이다. 의사선생님은 몇 가지를 당부했다. 그중 하나는 술과 관련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번에 소주 석 잔만 마시라고 했다. 담배는 아예 피우지 않으니 해당하지 않는다. 술은, 그렇게 마시지 못했다. 2020년에는 실천하도록 해야겠다.

 

양쪽 위아래 어금니가 제 구실을 하니까 좋은 점이 많다. 삼겹살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미더덕도 씹어 먹는다. 깍두기 같은 것도 먹기 힘들어하던 사람이 환골탈태한 것이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 치아와 전혀 상관없는 일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입을 가려가며 웃던 버릇도 조금 없어진 듯하다. 웃을 때 어금니까지 보는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다.

 

주변에 치아 아프다는 사람 있으면 얼른 치과에 가라고 부추긴다. 미루면 미룰수록 아프기만 하고 돈도 더 들어간다. 그건 분명한 진리다. 미련하게 버틴다고 새 치아가 나오는 건 아니다. 바보처럼 견딘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다른 모든 병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치아는 스스로 아프다고 여기고 문제 있다고 판단되면 머뭇거리지 말고 치과로 갈 일이다. 18개월 동안 치과 다니면서 깨달은 것이다.

 

4. 계약직에서 조교로 신분이 바뀌다

 

20043월 경상대학교 홍보팀장으로 왔다. 전문계약직이었다. 계약직이라고 차별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은 없었다. 인품과 도덕이 흐르는 좋은 직장이다. 하지만 계약직은 엄연한 계약직이어서 마음속으로 섭섭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무기계약직으로 바뀌었다. 해마다 연봉은 경신하지만 정년은 보장받는 것이었다. 기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대학회계제도가 바뀌면서 무기계약직은 대학회계직으로 바뀌었다. 올해 2월말까지 나는 대학회계직(무기계약직)’이었다.

 

2월말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여차저차하여 대학에서 조교를 한 명 채용하게 됐다. 좀 귀찮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조교로 채용됐다. 국립대학에서 조교는 공무원이다. 해마다 임용을 경신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무원이다. 우리 집안 전체에 공무원은 처음이다. 처갓댁으로 보더라도 공무원은 없었다. 자랑할 만했다. 호적 나이로 쉰 살에 공무원이라니.

 

대학회계직은 60살이 정년이다. 조교는 62살이 정년이다. 2년 더 근무하게 됐다. 62살 정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첫째 건강해야 하고, 둘째 사고 치지 말아야 한다. 조교로 바뀌었다고 해서 하는 일이 바뀐 건 아니다. 15년째 해오던 일을 그대로 계속 한다. 보도자료 쓰고 사진 찍고 이런저런 글 쓴다. 쓰고 또 쓴다. 총무과 인사팀장에게 제발 다른 데로 보내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모르지만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해야겠다. 옆으로 곁눈질하지 말고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여 대학발전에 이바지해야겠다. 11년쯤 뒤 정년을 맞이한다면 웃으면서 떠날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겠다.

 

대학회계직에서 조교가 되면 월급이 조금이라도 오를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다달이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수십만 원 깎였다. 가정경제에 타격을 줄 정도였다. 절약도 한계가 있고 참는 것도 범위가 있다. 올해는 근근이 버텼다. 월급 깎인 건 나중에 2년 더 근무하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다. 그러니 그게 그거다. 내년에는 아내가 또 다시 부업전선에 나가게 되어 살아갈 방도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5. 고등학교 동기회 사무국장이 되다

 

고등학교 동기회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게 몇 년째인지 가물가물하다. 대략 1997년 말쯤으로 기억한다. 20년 이상 모임에 나갔다. 매월 18일이 모임 날인데 사정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 한 해에 12번 모임 중 적게는 서너 번, 많게는 열 번 정도 나갔다. 나름대로 성실한 친구였다. 동기회 모임에 가면 편안하다. 그중 몇몇은 자기 사업과 동문회를 연관 짓는 친구도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예전 추억 이야기하며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들로 취한다.

 

총동문회 체육대회를 주관한 적도 있다. 마흔 살 무렵이었다. 졸업 30주년 기념행사도 했다. 우리가 쉰 살 되던 3년 전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느낀 건, 동기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회장과 총무의 노력과 희생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회장이나 총무 같은 걸 도무지 해볼 생각도 안했고 시켜도 하지 않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직장 일에 목을 걸고 있는 사람이나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은 사람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할 일로 치부했다.

 

그러다가 20182월 임시총회에서 덜컥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원래 하던 사무국장이 사업 일로 그만두게 되자 회장이 나를 새 사무국장으로 지명한 것이다. 나는 한사코 안 된다고 외쳤다. 실제 나는 그럴 깜냥이 안 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박수소리에 내 외침은 묻혔고 어쩔 수 없이 대아고등학교 18회 동기회 사무국장이 되어버렸다. 앞서 회장과 사무국장을 하던 친구들이 마치 자기 일인 듯 도와주고 친구들 대부분이 따따부따 따지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미인지라 그럭저럭 1년을 버텼다.

 

201912월에는 사무국장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감투를 벗으려고 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1년을 더 하게 됐다. 그리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다. 다만 신경이 쓰일 뿐이다. 다달이 모임 기별해야 하고(문자를 보내는 친구는 따로 있다), 경조사도 신경 써야 한다(일일이 다 가볼 수는 없다). 동기회 밴드에 공지사항과 결과보고 같은 걸 올려야 한다. 무엇보다 해마다 4월에 열리는 총동문회 체육대회를 무사히 치러내야 한다. 한 번 해 본 것이라 두렵지는 않지만 그래도 꿈에 가끔 나타날 만큼 심리적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팔자에 없는 감투가 제법 무겁다. 마지막 1년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만이라도 더 애를 써보자. 20년 넘게 자기희생을 기쁘게 감수한 역대 회장, 사무국장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 보자. 친구들에게 보답한다고 생각하자.

 

6. 자동차에 부딪혔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212일 오후 520분경 교통사고가 났다. 나는 시내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려고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다가 달려오는 차에 치였다. 몸이 붕 뜨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 옆으로 꼬꾸라졌다. 워낙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진주시 내동 공영차고지 앞 횡단보도는 내가 날마다 출퇴근하면서 지나다니는 길이다. 운전자는 내 또래 여성이었다. 딸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내리자마자 짜증스럽게 화를 냈다. 곁에서 목격한 버스 운전 노동자가 아니었으면 나는 환자이자 피해자이자 죄인이 될 뻔했다.

 

그 차를 얻어 타고 복음병원으로 갔다. 가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오른쪽 팔꿈치가 찢어져 너덧 바늘을 기웠다. 오른쪽 허벅지도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푸른색과 파란색과 빨간색과 보라색을 뒤섞어 놓은 듯한 멍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입원은 하지 않았다. 운전한 여성의 남편이 달려왔다. 사고는 났고 치료만 잘 받으면 되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전화를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보험회사와 상의할 일이지 않은가. 따님도 놀랐을 건데 잘 위로해 주라고 했다.

 

복음병원에 물리치료를 다녔다. 물리치료는 허벅지나 팔꿈치 한 곳만 해준다고 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한의원으로 옮겼다. 한의원에서는 두 곳 다 찜질해 주고 침을 놓아 주었다. 4월 중순까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병원을 다녔다. 마지막에는 허벅지 타박상 입은 데가 물혹처럼 부풀어 올라 깜짝 놀랐다. 한의사는 이미 겪어봐서 안다는 듯이 썩은 피를 뽑아냈다. 그렇게 상처는 아물어 갔고 사고의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아프다. 오른쪽으로 모로 누우면 다친 부위가 아프다. 팔꿈치도 어디에 닿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아프다. 아마 평생 동안 안고 가야 할 것 같다.

 

상대방 차량은 종합보험을 들지 않았다. 보험금 제한이 있어서 병원에도 오래 다니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것마저 내 복이려니 했다. 그렇게 차에 치여 그만한 정도라면 축복 아니겠나. 나중에 보험회사에서 합의금 사십 몇 만 원을 준다고 연락이 왔다. 안 받고 싶었으나 받아야만 행정처리가 끝난다고 해서 계좌번호를 불러주었다.

 

2019. 12. 31.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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