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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르뱅스타 독일빵집

by 이우기, yiwoogi 2019. 12. 25.

 


남해 독일마을에 갔다. 특별한 까닭은 없다. 눈 뜨자마자 문득 생각난 곳이 남해였다.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오래전 봤던 <응답하라 1988> 19~20회를 보며 울다가 웃다가 졸도했다. 휴일오전엔 한번씩 졸도해 주는 게 건강에 좋다. 12시쯤 다시 깨어 국수를 먹었다. 대충 씻고 길을 나섰다. 아내가 동행했다. 햇볕은 따사로웠다. 오늘 같은 날은 은혜로 충만했다고 하는 게 낫겠지. 사천 지나 남해로 접어들었다.

 

가는 동안 독일마을 <르뱅스타 독일빵집>을 생각해 냈다. 한 직장에서 일하는 한길영 팀장님의 동생(한추영 님)1년 반 전에 문을 열었다. 독일마을 맥주축제 기간에 한 팀장님은 사흘 동안 여기서 알바를 했다고 했다. 빵을 그다지 즐겨먹지 않는 나도 한번은 가야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집에서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빵집은 아담했다. 작은 가게 문을 여니 마치 독일을 찾아간 듯 넓고 컸다. 빵 냄새는 낮게 깔려 있었다. 팥이나 설탕이나 달걀이나 설탕 같은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자나 마늘 냄새에 가까웠다. 그 냄새를 구분할 줄은 모른다. 막연히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려고 미리 준비한 듯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빵은 당겼다. 목은 마르지 않았으나 커피는 필요했다. 단둘이 앉아 빵 몇 조각 먹으면서 빵집 안을 쉬엄쉬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주인장의 손길과 마음길이 오고간 흔적이 역력했다. 남해이면서 독일처럼, 빵집이면서 추억의 집처럼 꾸며놓았다. 빵은 좀 딱딱한가 했는데 부드럽고 퍼석한가 했는데 촉촉했다. 유기농 밀가루 안에 남해에서 나는 마늘과 유자 같은 재료가 섞여 있었다. 빵 이름은 잘 모르겠다.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아가씨와 함께 들어온 총각은 멋져 보였다. 손자를 뒀음직한 두 여인은 아마 며칠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는 방랑객일 것이다. 벙거지를 둘러 쓴 손님, 다정히 손 맞잡은 손님들, 어린아이들이 들어와서 빵을 사 갔다. 누구나 다 아는 독일마을과 좀 떨어진 곳에 가게가 앉아 있는데도 손님은 끊이질 않았다. 알고 보니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가게였다. 이런저런 방송국과 여행전문잡지 같은 데서 수차례 취재를 했었던가 보다.

 

집으로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요즘 떠오르는 남해 여행 핫 플레이스’, ‘독일 정통 스타일의 빵을 선보이는 베이커리’, ‘상동 독일마을 내 르뱅스타 베어커리 직원 모집’, ‘남해독일빵집 르뱅스타 슈톨렌과 핸드드립커피로 여는 일상’, ‘남해 독일빵집 르뱅스타_유자파운드, 슈톨렌’, ‘남해로 여행 중에 가본 독일빵집 르뱅스타 베이커리, 르뱅스타빵집’, ‘화학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르뱅베이커리이런 말이 보인다. ‘르뱅스타가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팀장님께 카톡으로 다녀간다고 신호를 보냈다. 신고를 철저히 하는 건 몸에 밴 습관이다. 전화가 왔다. 곧 도착하니 기다리란다. 우연도 별스럽다. 마침 동생네 빵가게로 오고 있단다. 넷이 둘러앉아 잠시 인사 나누고 일어섰다. 한 팀장님은 우리에게 남해 시금치 한 봉지를 주신다. 한 팀장님 형제들은 한번 제대로 인터뷰해 보고 싶은, 뭔가 재미있고 훌륭하고 배울 만한 사연을 간직한 분들 같다.

 


물건항 바닷바람을 쐬었다. <환상의 커플> 연속극 촬영한 길을 거닐었다. 요즘 한예슬은 어디에서 뭐할까, 잠시 생각했다. 하늘을 날다가 바다에 사뿐 내려앉는 오리를 찍었다. 물밑에서 솟구치는 물고기를 봤다. 숭어겠지. 잎이 다 져버린 방조림 나무들을 보았다. 바다는 평화로웠고 잔잔했다. 햇살은 아늑했다. 12월 같지 않은 날이다.

 

본가와 처가가 남해에 있는 팀장 덕분에 저녁은 시금치로 밥상을 차렸다. 아내가 시금치를 데치고 시금치 된장국을 끓이는 동안 나는 삼겹살 한 조각을 굽고 달걀배추전을 부쳤다. 시금치는 달다. 그런가 하면 고소했다. 그런가 하면 물렁물렁했다. 그런가 하면 졸깃거렸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가진 남해시금치는 이맘때는 특히 꽤 높은 그 무엇이다.

 


냉장고 깊숙이 쟁여 놓은 <진로> 한 병과 <테라> 한 깡통을 까서 부부가 건배한다. 밥상을 오롯이 다 비우는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나 홀로 집에3>을 했고, 우리는 무탈하게 견뎌온 한해를 축복했다. 엊저녁 극단 현장의 <고추장수 서일록 씨의 잔혹한 하룻밤> 연극 본 뒤 집에서 셋이서 송년회를 했고 오늘은 2부 송년회를 아내와 단둘이 단촐하게 치렀다. 이렇게 한 해가 간다. , 아직 엿새나 남았다.

 

2019. 12. 24.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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