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 것이라던 예상은 빗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햇살은 부드럽게 펼쳐졌다. 마당극 공연하기에도 알맞고 구경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이건 복이다. 하늘도 도와주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이다. 간혹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러하다.
며칠 전에 함께 갈 벗들을 모았다. 차 한 대에 타기 좋게 모두 4명이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교수 한 분과 경영정보를 전공하는 교수 한 분과 한약사협회에서 일하는 한 분이다. 10시 50분 하동 가는 길목 이현동에서 만났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새삼 유명해진 ‘퀸’ 노래를 들으며 출발했다.
하동군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10년째 이어지는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났네> 올해 마지막 공연을 하는 날이다. 사실은 10월 27일 공연이 마지막이었는데 올해 예정했던 공연 가운데 한 번 못한 것을 추가로 하게 된 것이라 한다. 덤으로 얻은 마지막 공연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금요일부터 찌뿌드드하던 허리가 문제였다. 앉았다 일어서면 허리가 바르게 펴지지 않았다. 퇴근 길에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신통하게도 좀 나아지는 듯했다. 공연 보러 가는 아침에 또 허리가 묵지근하다. 9시쯤 한의원으로 다시 갔다. 갑작스런 배탈로 치료 도중에 화장실을 두 번이나 갔다. 이런 환자는 나 말고는 없을 것이다. 1시간 동안 치료를 마치고 일어서니 함께 갈 한 분이 문자를 보낸다. 10시 5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왔단다. 한 시간이나 일찍.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분은 오래 전부터 꼭 한번 같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왔던 분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그 마음 함께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약속대로 10시 50분쯤 출발했다. 한 분은 말했다. “마당극 보는 것을 중심으로 관광상품을 개발해도 되겠다. 회원을 모집해서 마당극 보고 화개장터나 쌍계사 구경하고 점심 먹고 돌아오는 상품이면 안 되겠나?” 이런 이야기였다. 스무 명 남짓 타는 버스를 대절하여 공연장 따라다니는 관광상품도 괜찮겠다 싶었다. 마당극 공연은 대개 관광지나 축제 현장에서 하니까. 나중에 누군가 그런 역할을 하겠지.
다른 한 분은 말했다.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극단이 우리 지역 말로 공연하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말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였다. 큰들에게 공연 작품 대본을 얻어 보면 좋겠다고도 했다. 역시 사람들은 자기 관심 분야를 먼저 챙기는 법이다.
길은 막히지 않았다. 우리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넷 가운데 더러 만나는 사람도 있고 가끔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숫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극단 큰들 마당극을 보러 간다는 설렘과 묘한 흥분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우리는 시속 60km로 달렸다.
나에게는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났네>를 올해 아홉 번째 보는 날이다. 3.1절 100주년 특별공연부터 시작하여 3월 9일, 5월 25일, 5월 26일, 9월 15일, 10월 13일, 10월 26일, 10월 27일, 11월 9일이다.
3.1절 특별공연에는 아내와 아들과 정형상 형님과 함께 갔다. 특별공연답게 관객이 많았다. 큰들 단원들이 모두 총출동했다. 감동에 젖은 눈물 제법 흘린 날로 기억한다. 봄을 먼저 알리는 매화가 가득하고 아지랑이가 하품처럼 피어오르던 날이었다. 최참판댁 동네 골목을 수많은 사람이 가득 메웠다.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할 때는 감격에 젖었다.
3월 9일엔 혼자 갔다. 횡천 미나리 밭에서 봄 향기가 번지던 즈음이다. 5월 25일엔 아내와 갔다. 4월 19일 이사한 뒤 집을 어느 정도 정리한 즈음이다. 5월 26일엔 혼자 갔는데 고소산성에 올라가 보았다. 악양 무딤이들과 섬진강을 넓게 넓게 감상하던 날이다. 9월 15일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아내와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들, 큰형과 형수님이 함께했다. 10월 13일엔 동네 누님, 형님과 함께 갔다. 재첩국수를 처음 만난 날이다. 10월 26일엔 혼자 갔다. 마당극 시작을 알리는 길놀이에서부터 공연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하는 장면까지 끊지 않고 모두 영상으로 담은 역사적인 날이다. 10월 27일은 아내와 아내 친구, 그의 어머니와 함께 갔다. 모녀간의 알콩달콩 행복함에 잠시 기댄 날이다. 그리고 11월 9일 올해 마지막 공연을 4명이 함께 즐겼다.
나는 올해에만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37번 보았다. 앞으로 한두 번 더 보게 되지 않을까 짐작하지만 그건 알 수 없다. 기왕 여기까지 달려온 것, 40번을 채우면 좋겠지만 못 채워도 괜찮다. 지난해 35번에 이어 올해도 꾸준히 재미있는 마당극을 함께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더없는 다행이고 행복이다. 함께 공연 보러 간 분들이 고맙다. 가는 길 오는 길 아무 일 없이 무사했던 행운도 감사하다. 무엇보다, 우여곡절이 없진 않았겠지만, 성공적으로 공연을 이끌어가는 큰들이 무한히 고맙다. 그 고마움을 가슴에 안고 또 마당극 보러 갈 기회가 언제 있을까 두리번 두리번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지난해 5월 처음 상설 마당극장을 찾았을 때, 작품 하나에 10번 정도는 볼 수 있을까, 아니, 다 합하여 100번 정도 볼 수 있을까 막연히 짐작해 보곤 했다. 작품마다 10번 보는 건 이뤘다. <역마>는 워낙 공연 횟수가 적어서 어렵지만 나머지 네 작품(<오작교 아리랑>, <효자전>, <최참판댁 경사났네>, <남명>)은 10번 넘게 보았다. 이것만 해도 스스로 대단하고 대견하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렇게 마당극을 자주 보러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 까닭은 열 가지도 넘는데 대충 말하면 이렇다.
첫째, 재미있다. 웃기고 울린다. 손뼉치며 노래 따라 부른다. 이런 건 흔치 않다. 그 어떤 영화도, 연극도, 오페라도, 뮤지컬도 이보다는 재미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 기준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장르는 다를 것이다. 나는 마당극에 꽂혔다. 보고 또 봐도 처음 본 듯 재미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날 날씨에 따라, 관객의 태도에 따라, 관객 배우의 연기에 따라 상황은 늘 다르니까 항상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 늘 재미있다.
둘째, 감동을 준다. 작품마다 우리 마음을 적시는 대목이 있다. 아리랑 노래가 그렇고 부모 잃고 우는 아들들의 울음이 그렇고 왜놈에게 끌려가는 소녀가 그렇다. 공연장에 가 보면 꼭 눈물 훔치는 사람이 있다. 어떤 때는 너무 웃겨서 울고 어떤 때는 너무 슬퍼서 운다. 어떤 때는 내가 마당극 속 주인공인 듯하여 울고 어떤 때는 그동안 살아온 삶이 미안하고 부끄러워 운다. 감동은 웃음도 주고 눈물도 준다. 마당극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셋째, 교훈을 준다. 효도가 중요함을 일러주고 남북통일이 필요함을 알려주고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준다. 마당극을 만드는 사람들이 미리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냥 한 시간 동안 즐기고 놀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아무 의미 없이 놀고 즐기지는 않았을 것임을. 공연 관람 후 돌아서면서 깨달을 것이다. 깨달음은 다른 말로 교훈이라 해도 되겠다.
넷째, 취미 생활로 그만이다. 낚시든 등산이든 패러글라이딩이든 자전거든 취미가 하나쯤 있으면 여러모로 좋다. 마당극 구경 가는 것도 취미다. 대개 취미 활동에는 돈이 든다. 낚싯대 하나에 수백만 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등산 장비 일체를 갖춘대도 수백만 원은 우습게 들어간다. 마당극 공연 보는 데는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관람하는 데는 입장료가 없다(정기공연은 돈 받는다). 가는 길 오는 길 차비와 점심 밥값 정도 든다. 아차, 또 있다. 공연 본 뒤 돌아와서 함께한 벗들과 한잔 하자면 조금 더 든다. 그것뿐이다. 아차차, 또 있군. 공연에 감동하고 감격하여 후원회원에 가입하면 돈이 든다고도 하겠지. 하지만 이건 낚싯대 값이나 등산복 값에 견주면 새발의 피 아닌가. 적은 돈이라도 그것이 극단 큰들에 얼마만큼 큰 힘을 주는지 알게 되면 조금도 아깝지 않을 후원이다.
다섯째, 관광이다. 마당극을 상설공연하는 곳은 산청 동의보감촌, 하동 최참판댁인데 그곳이 곧 관광지이다. 산청과 하동은 우리 지역 관광의 보고이다. 공연 시간 앞뒤로 유명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다. 남해 스포츠파크에서 공연한다고 하여 가 보면 축제를 하고 있다.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여 가 보니 축제 현장이다. 진영에서 공연한다기에 가 보니 역시 단감축제를 하고 있었다. 주 목적이 마당극이었기에 축제 전체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곳곳에서 펼쳐지는 재미있는 축제의 한 귀퉁이라도 감상하는 여유가 생긴다. 마당극 덕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나.
여섯째, 체력 단련이다. 공연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운동이다. 하동 고소산성, 산청 왕산, 필봉을 마당극 없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토요일, 일요일 하루 종일 방바닥 짊어지고 있었을 것을 마당극 덕분에 툴툴 털고 일어나게 되고 일어난 김에 근처 높지 않은 산을 구경하게 된다. 길 나선 김에 일석이조를 챙긴다. 제법 땀 흘리고 나면 한주 동안 노동의 피로를 씻고 알코올도 씻어낸다.
일곱째, 식도락이다. 마당극 공연을 보러 가면 대개 점심시간이다. 밀면, 재첩국, 어탕국수, 비빔밥, 버섯전골, 재첩국수, 메밀묵, 해물파전, 메기 매운탕, 쟁반밀면, 막걸리, 동동주 따위 맛난 것을 먹게 된다. 관광지엔 먹을 게 많다. 공연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일행과 한잔 할 수도 있다. 국숫집에 앉아 파전 시켜 놓고, 배우들 훌륭한 연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총각 김치는 아삭아삭 맛있고 국수 한 가락은 졸깃졸깃 맛있다. 그런 재미가 있다.
여덟째, 동행하는 분들과 행복을 나눈다. 공연 보러 혼자 가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사람들 모아 함께 간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잠시 동안 나눈다. 행복은 나누면 더 커진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재미있고 동년배들도 그만큼 이야깃거리와 행복한 사연들을 안고 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행복은 전염된다. 공감과 소통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마당극 보러 간다.’는 공통 목적이 있는 동행인지라 쉽게 섞이고 가볍고 주고 받는다.
아홉째, 진정성을 배운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대충 하지 않는 극단 큰들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갖춰야 할 인성의 하나를 몸소 배운다. 그것은 진정성이다. 무대를 꾸미는 것에서부터 남다르다. 그냥 두어도 아무도 모를 구석진 곳 흠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100회 이상 공연한 것은 물론이요 200회를 넘게 공연한 작품인데도 큰들은 늘 최종 연습(리허설)을 한다. 한 것을 다시 해보고 한 것을 또 해보고 한 것을 한번 더 해본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실수를 미리 막는 것이다. 진정성 없이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문’ 배우요 ‘전문’ 극단답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네 일상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일터와 삶터에서 진정성 있게 말하고 행동했던가. 잘 안 된다. 배우고 또 배우지만 나는 잘 안 된다. 아직 멀었다.
열째, 큰들 배우들에게서 행복 기운을 얻는다. 그들은 공연장 안팎에서 늘 밝고 환하다. 자기 일에 긍지를 갖고 있다. 우리 문화, 우리 전통에 대하여 자부심이 대단하다.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공연을 진행하는 데 자잘한 어려움도 있을 것인데도 그들은 늘 낙관한다. 긍정한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고 해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긍정과 행복의 에너지를 큰들로부터 좀 얻어간다.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났네>는 하동 토지문학제가 10주년을 맞이하던 2010년 9월 25일 처음 공연했다. 그때는 서희와 길상의 결혼까지 30분 정도 되는 단막극이었다 한다. 그때는 내가 마당극을 보러 다니지 않은 시절이다. 2011년 경남문화재단(지금의 경남문화예술진흥원) 레지던스 지원사업으로 독립운동과 해방 장면까지 추가하여 1시간 짜리 마당극을 완성했다. 그후 지금까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10년째 공연해오고 있다(1년에 한 번씩 남이섬에 간다. 거기서 ‘하동의 날’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배역도 많이 바뀌었다 하고 거쳐간 배우도 많다 한다. 11월 9일 공연은 177회째이다. 실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 공연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좀 특별했다.
첫째, 공식적으로는 상설공연 마지막 공연(10월 27일)을 한 뒤 추가로 공연한 것이어서 그동안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쉬웠던 분들께 큰 선물이 되었다. 마음먹었지만 못 가 본 사람도 있겠지. 최참판댁에 놀러 갔다 왔는데 공연이 열리는 줄 모르고 그냥 돌아와 땅을 치고 후회한 사람도 있겠고. 기회가 되면 꼭 한 번은 가 보리라 다짐하던 분들께 이날 공연은 선물이라고 할 수밖에.
둘째, 2010년 9월 토지문학제 10주년 행사의 하나로 처음 공연한 이후 햇수로 10년째인데, 10년째의 진짜 마지막 공연이다. 배우들도, 관객들도 느낌이 남다를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배우가 바뀐 적도 있다. 비 때문에 공연을 취소한 날도 있다. 관객이 너무 빽빽이 들어차 배우들이 이동하는 데 어려웠던 적도 있다. 지나치게 심취한 관객들이 악역 조준구에게 뭇매를 놓는 날도 있다(이날 공연 때도 도망가는 조준구를 관객들이 붙들어 쓰러뜨렸다). 배우가 아파서 공연 직후 병원에서 링거 신세를 진 적도 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에 힘이 불끈불끈 솟아난 날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10년을 달려 왔다. 10년째 되는 해 마지막 공연이라...
셋째, 배우가 좀 바뀌었다. 악역 조준구를 비롯해 한두 명 바뀐 것이다. 배우가 바뀔 수밖에 없는 사연은 마음 아프지만 단골 관객들에겐 색다른 맛을 선사해 주었다. 조준구를 연기하던 오진우 배우가 뜻하지 않게 당분간 쉬게 됐다. 다른 배우 한 명도 다리가 아파 쉬게 됐다. 마지막 공연에 예정에 없이 배우가 두 명 바뀌었다. 연기 실습 중인 학생도 나왔다. <최참판댁 경사났네>를 처음 보는 관객들은 그런 과정이나 사연이 별로 의미없을 것이다. 몇 번씩 관람하는 관객들에겐 그런 것마저 재미이고 추억이고 감동이다. 아픈 배우들 빨리 낫기를 빈다. 모든 배우들 아프지 말고 가고 오는 길 안전하기를 또한 빈다. 간절히 빈다.
이날 조준구를 맡은 배우는 이규희 씨다. 극단 큰들 대표다. 그는 <오작교 아리랑>에서 남돌이 어머니로 나온다. 특유의 앙칼진 고음이 아주 매력적인 배우다. 조준구로 나온 그는 이전에 연기하던 배우 오진우 씨가 좀더 나이가 들어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같았고 달랐다. 매정함, 비열함, 비정함은 앞 배우보다 더했다. <오작교 아리랑>의 남돌이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던 건, 나에겐 또다른 재미였다. 이규희 씨가 조준구를 맡기로 한 게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와 동작을 모두 완벽하게 연기했다. ‘복사하기→붙여넣기’를 한 듯이(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원조 조준구였다. 오진우 씨가 조준구 역을 맡기 전에 이규희 씨가 조준구를 연기했다는 것이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였건만 뛰고 구르고 소리지르는 배역인지라 땀이 온몸에 그득했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보면서, 배우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란 저런 모습이로구나 싶다. 이전에 연기하던 오진우 씨 또한 땀과 함께 뛰어다녔다. 마당 바닥에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게 관객들에게도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튼 이규희 씨의 조준구는 지난밤 꿈에 나타났다. 앙칼진 고음이 귓가에서 밤새도록 웅웅거렸다.
넷째, 추수가 끝난 악양 무딤이들을 볼 좋은 기회였다. 평사리 들머리에서 차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부부송 가까이 가 보고 싶었다. 일행들은 탄성을 질렀다. 한산사 앞에 올라가 겨울빛 차분히 내려앉는 섬진강과 들판을 한눈에 보았다. 감탄사를 여러 개 내뱉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 풍경과 마당극 가운데 어느 것이 주연이고 어느 것이 조연인지 헷갈리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다.
다섯째, 그동안 마당극은 오후 2시에 공연했는데 이날은 12시 30분에 공연했다. 점심시간이 애매해졌다. 보통 때는 12시쯤 도착하여 맛난 점심을 먹고 막걸리도 한잔씩 하고 근처를 구경했다. 여유 부리며 차도 한잔 마셨다. 이날은 공연 본 뒤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막걸리 한잔 해야 더 재미있게 공연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없지는 않았으나, 중간에 화장실 가는 낭패를 피하기 위해 참았다. 대신 대봉감 말랭이 하나로 허기를 속였다. 공연 중 간식 먹는 관객은 보이지 않았다.
여섯째, 마당극 공연 앞 11시, 공연 뒤 2시에는 하동 청소년 풍물단 ‘하울림’의 공연이 있었다. 12시쯤 도착하여 평사리로 올라가는데 오전 공연 마친 어린 친구들이 여럿 보였다. 그들은 마당극도 열심히 보았다. 1부를 마치고 2부 장소인 최참판댁 안채에 달려가니 하울림 단원 여럿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녀석들. 그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손뼉 치고 힘차게 태극기 흔들었다. 우리는 배가 고팠으므로 오후 2시 공연도 보지 못했다. 식당 ‘사랑채’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위쪽에서 풍물소리가 쿵쾅 들려온다. 멋지게 공연하였으리라 믿는다.
“1부 길놀이 할 때 털보는 2부에서는 안 나왔는가?” “아, 길상이가 그 털보라네.” “배우들이 여러 배역으로 연기를 하데?” “그렇지, 정말 정신없이 나왔다 들어가고 들어갔다가 나오고. 헷갈리지 않는가 몰라.” “배우들 배역이 딱 들어맞더라. 길상도 그렇고 조준구도 그렇고.” “그 말은 연기를 아주 잘하더라는 말과 같재?” “그래,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 “그래서 전문극단이라고 하지 않나?” “서희는 사투리를 안 쓰더만.” “그러게. 서희는 가볍지 않게, 중심을 잡는 담당 아니었을까?” “서희마저 사투리를 쓰면 어찌 될까?” “글쎄. 재미있겠는걸. 아니면 전체가 너무 가벼워지지 않을까?” “마당극 한번 공연하면 얼마나 받는고?” “그건 모르지. 오래된 작품은 적게 받고 얼마 안 된 작품은 좀 많이 받지 않겠어?” “좀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단원들도 더 잘살게 되고, 그래야 더 좋은 작품도 만들겠지.” “후원회원이 많은가 봐?” “2000명은 안 되는 것 같고 1900명은 넘는 것 같고.” “꽤 많네.” “그래도 모자라지. 한 5000명쯤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큰들, 정말 대단해. 정말….”(이날 나온 이야기에 내 소망을 조금 담아서 각색했다) 대화는 끝이 없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보다 길었다.
공연 마치고 점심 먹고, 한 명은 구례로 가고 한 명은 진주로 와서 공부할 것 챙겨 학교로 가고 한 명은 가족 행사를 위해 창원으로 가고 한 명은 본가에 가서 형제들과 술 한잔 하였다. 형제들과 술 한잔 한 놈은 나다. 소주와 맥주와 일본 술이 있었다. 회와 돼지고기 수육과 대구탕이 있었다. 어머니도 모처럼 몇 잔 드셨다. 축구선수로서 서울에 있는 축구 명문대에 합격한 조카를 축하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 집을 하얀 빛깔 벽지로 도배하는 데 들인 수고로움을 서로 위로했다. 밤은 길었다. 몸은 약했다. 술에게 졌다. 그래도 다음날 일어나 오전 내도록 후기라는 것을 쓰는 이 순간은 행복하다. 공연 보는 행복이 100이라면 후기 쓰는 행복은 99쯤 된다.
11월 14일(목) 오후 3시 산청 한국선비문화연구원에서 <남명>을 공연한다 하는데, 11월 23일(토) 오후 5시 경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오작교 아리랑>을 공연한다 하는데, 마음은 하염없이 설레는데…. 11월 10일(일) 오늘 오후 1시엔 양산 물금에서 <오작교 아리랑>을 공연한다는데, 멀리서 응원의 손뼉만 열심히 보낸다.
2019. 11. 10.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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