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명절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안 계신 2012년 추석이었다. 그해 음력 7월 27일 돌아가셨으니 장례 치르고 보름 만에 추석이 돌아온 것이었다. 참 쓸쓸하고 외로웠다. 속으로 눈물 삼키며 용케 명절을 쇠었다. 가족 가운데 가장 슬픈 사람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평생 아옹다옹 다투면서도 일생 동안 딴 마음 먹지 않고 가족을 건사한 동반자였으니까.
그다음 슬픈 명절은 올 설이었다. 어머니는 1월 24일 병원에 입원하셨다. 1월 9일 함양 둘째 이모 돌아가신 뒤 마음이 너무 아팠을 것이고, 장례 따라다니느라 몸도 아팠을 것이다. 큰 병치레 한 번 없으셨는데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입원한 지 사흘째이던 26일 오전 허리 수술을 했다. 큰 수술이었다.
형제들과 며느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의논했다. 어머니 병 간호는 서로서로 번갈아가며 하되 우리가 감당 못할 부분도 있을 것이니 간병인을 부르기로 했다. 간병인은 수술한 날부터 나흘 동안 어머니를 돌봤다. 병원비는 얼마가 나오든 공평히 나누어 부담하기로 했다. 큰방에는 1인용 침대를 들이기로 했다. 문갑과 텔레비전 위치 옮길 일도 의논했다. 형제가 많은 건 큰 위로와 많은 지혜의 보고였다. 어머니 안 계실 동안 본가를 들락날락하며 개 밥 챙겨 주고 똥 치우는 일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돌아가며 신경썼다.
문제는 설날 차례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보통 명절 때는 어머니께서 일주일 전부터 필요한 제수를 준비하셨다. 중앙시장이 멀지 않으니 시시때때로 건어물부터 사들였다. 과일도 사고 나물거리도 샀다. 생선은 아는 가게에 주문해 놓고 돼지고기는 아들에게 시키셨다. 우리는 명절 앞날 달려가 굽고 삶고 지지고 무치면 되었다.
며느리가 넷이나 되었지만 다들 생업에 바쁜지라 모두가 나서지는 못해 왔다. 어머니는 총감독 겸 선수였다. 커다란 솥에 물을 가득 붓는 일이 하루 종일 계속됐으므로 힘센 아들들이 나서야 했다. 차례상에 올릴 것과 우리들의 안주가 될 것들을 요령있게 구분하여 장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셨고 어머니의 판단과 지시만 따르면 되었으므로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었다, 한번도.
이번에는 달랐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누워 계신다고 하여 차례 준비에 달라질 것이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작은 반란을 꿈꾸었다. 어머니 계시지 않는 설 명절 차례상을 우리 식대로 차려보자는 것이었다. 정성과 성의는 다 갖추되 그 종류와 양을 최소한으로 줄이기로 한 것이다. 사실 몇 해 전부터 노상 주장해 오던 것을 어머니 안 계실 때 실천해 보자는 실험정신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큰집에 갖고 가야 할 음식도 조금 조절해 보자 싶었는데, 그건 뜻대로 되었다고도 할 수 없고 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머니는 병원 입원 전에 용한 점집에 가서 올 한 해 신수를 보았는데 “조상 때문에 시끄럽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용한 점쟁이의 예견이 맞았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집은 차례상을 아예 없앴다고 한다. 어떤 유명한 가문에서는 아주 단출하게 상을 차린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게 목표라고 여기지만 좀 더디 가는 편이다.
2월 2일 토요일은 쉬었다. 나는 목욕하고 뒷동산에 갔다 오고 저녁엔 동문회에 갔다. 고등학교 동기들이 명절 쇠러 멀리서들 오는 날이니 다함께 모여 얼굴이나 보며 복을 빌자는 뜻이었다. 10명이 모였다. 숫자로는 적은 편이다. 그 자리에서 회장은 날더러 새 총무를 맡으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재간이 없고 재주도 없으며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다. 사양했고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째 친구들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가서 숟가락만 얹어 왔으니 이제라도 한몫 이바지하라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잘할 자신은 없다. 적당히 마셨다.
2월 3일 일요일은 본가로 달려갔다. 가장 바쁜 큰형수와 큰형님이 이미 여러 가지 제물을 사놓았다.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산적과 생선전, 두부전은 미리 부쳤다. 과일도 이미 사 놓았다. 생선은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인 가게에 주문해 놨다고 한다. 아침도 먹지 않고 달려온 큰형과 아점을 먹었다. 우리가 명절 동안 먹기도 하고 차례상에도 올려야 할 돼지고기는 동생이 사 왔다. 돼지갈빗살을 삶고 있으니 창원에서 작은형이 달려왔다. 나는 저녁에 또 동문회(반창회)가 있었으므로 술은 입에 대지 않았지만 소주와 맥주 병이 여럿 뒹굴었다.
저녁에는 고등학교 같은 반 졸업 친구들이 모였다. 열두 명이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달려온 친구들이다. 졸업 후 33년만에 처음 본 친구도 있고 그사이 여러 번 만나던 친구도 있다. 횟집 방을 전세 내어 떠들고 마시고 놀았다. 한 해에 한두 번이라도 지속적으로 만나자고 의논들을 모았다. 그 모임을 주선해 나갈 소임을 또 내가 맡았다. 전체 동기회의 사무국장이니 덩달아 추진해 보라는 친구들의 명령이었다. 이번 모임을 만들어나갈 때 남달리 좀더 관심을 가진 것을, 친구들은 정말 내가 일을 잘 추진하는 것으로 안 모양이다. 큰일이다. 많이 마신 술김에 그러자고는 했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작은설날이자 입춘이다. 날씨가 맑고 따뜻했다. 본격적으로 차례상을 준비하는 날이다. 다시 돼지고기를 삶고 생선을 쪘다. 나물을 데치고 무쳤다. 탕국에 들어갈 무와 두부를 썰었다. 큰형님과 작은형님, 나, 동생들 네 형제는 제법 부지런을 떨었다. 며느리 가운데 유일하게 이틀연속 참석한 아내의 노고와 마음씀씀이는 각별히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한번 앉았다 하면 밥그릇, 국그릇, 각종 접시와 수저가 한가득 나오는 식구 많은 집에서 한 끼 한 끼를 차려내고 치워내는 일은 정말 중노동이다. 나는 설거지 두어 번 한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 여긴다. 역시 미안한 일이다. 작은형은 밤새 취중인데도 온 집안을 쓸고 닦았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설명절 긴 연휴 중 어찌하다 이날 아침에 여차저차하여 안동 민속주 45도짜리 800밀리리터 한 병을 얻었다. 소주도 독하다 하여 소맥으로 말아먹는 주제에 어쩌자고 이 병을 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2일, 3일 연속으로 마신 것을 잊은 채 나는 귀하디 귀한 안동 민속주의 맛과 향기에 취하고 말았다. 돼지고기 수육 안주 삼아, 돼지고기 뼈다귀 시래기국 해장국 삼아 마시고 또 마셨던가 보다. 이른 저녁쯤 나는 곤드레만드레 되어 쓰러졌고 아들의 어깨에 의지하여 헤롱헤롱 겨우 귀가하였다. 조카들이 치킨이라 이르는 것을 사먹겠다 하여 내가 형제들로부터 1만 원씩 거두어 준 것 같은데 먹어본 기억은 없고, 집에 가서는 발 닦고 이 닦고 잔 것 같은데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그나마 낮에 맨정신일 때 어머니 병실에 다녀온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설날 아침에 5시 50분에 울린 내 전화기 소리도, 그로부터 10분 뒤 울리는 아내 전화기 소리도 들릴 리가 있겠나. 7시에 본가에 모여야 하는데 눈을 뜨니 7시 20분이다. 부랴사랴 아들도 깨우고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간다고 갔는데 꼴찌다. 면목없는 일이다. 형제끼리 세배하고 조카들 세배받고 세뱃돈 나눠주고 떡국 끓여 요기하고... 나와 아내는 아버지 차례상 차리는 당번을 맡아 남고 나머지 형제들과 가족들은 미천면 안간 큰집으로 향했다.
떡국 국물도 해장이 되는 것인지 속이 조금 편해져서 작은방에 등을 깔고 누워 30분 정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차례상 준비가 다급해졌다. 제기를 꺼내어 닦고 이 방 저 방, 이 냉장고 저 내장고에 흩어져 있는 제물을 아내와 부지런히 챙겼다. 아내가 끓이는 탕국 간을 보겠다며 몇 국자 떠 먹다가 숫제 그릇에 국물을 담아 놓고 오며가며 마셨다. 속이 제법 풀어졌다. 머리는 아팠다. 화장실 들락거릴 때마다 씻은 차가운 손을 호호 불어가며 차례상을 진설했다.
차례상은 단출했다. 조율이시도, 홍동백서도, 좌포우혜도, 어동육서도 모두 지킬 수 없었다. 되도록 홀수로 차리고 되도록 예쁘게 차리고 되도록 좌우 균형이 맞도록 차렸다. 어머니 입원하신 뒤 형제들이 의논하고 모의한 것에 견주면 진수성찬이지만 지난해 추석이나 설날 차례상에는 비할 바 아니었다. 해마다 제기가 모자라고 제상이 비좁다고 아우성이었는데 올핸 제기가 여남은 개 남았고 제상도 헐빈했다. 이런 저런 과정을 죄다 내려다보고 계셨을 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것이고 병실에서 걱정만 하고 계실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렇지만 쓸쓸하고 섭섭하고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존재와 어머니의 입원은 그렇게 우리 집 차례상 귀퉁이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큰집에 갔던 가족들과 사촌형 가족들이 왔다. 낮 12시 정각에 아버지 차례를 올린다. 좁아터진 거실에 비좁게 붙어서도 공간이 모자라 손녀 두엇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절하고 잔 따르고 절하고 잔 올리고 절하고 잔 비우고 하다 보니 10여분 만에 차례가 끝난다. 며칠 동안 준비하고 정성들인 것에 대면 참 성의없고 간단한 차례인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급히 점심을 준비하여 한 그릇씩들 대충 비우고 산소에 간다. 나는 또 빠진다. 아무래도 어제 먹은 안동 민속주가 벌을 내리는 듯하다. 남정네들과 손자 손녀들이 산소에 간 사이 며느리 셋은 맥주 한잔씩 마시며 밀리고 미뤄두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나는 작은방에 드러누워 음악을 들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쫓기는 창원 조카가 인사를 한 뒤 떠났다. 어머니 퇴원할 즈음에 맞춰 들어올 침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일이 시작되었다. 워낙 콧구멍만한 방이다 보니 1인용 침대 들이기도 쉽지 않다. 어머니가 병실에서 머릿속으로 그려본 설계와 형님과 동생이 직접 가구점을 방문한 뒤 그린 설계가 크게 어긋나지 않은 것은 비교적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온 가족들이 나서서 장롱을 옮기고 문갑을 옮겼다. 2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터라 켜켜이 쌓인 먼지가 눈뭉치 굴려지듯 둘둘 뭉쳐져 나온다. 그 찰나 장조카가 장롱 밑에 눌려 있던 돈봉투를 몇 개 발견했고, 대부분 빈봉투인 가운데 한 봉투에서 5만 원짜리 두 장이 나왔다. 내가 받아 두었다.
가족들이 모두 헌신적으로 힘을 보태준 덕분에 방 정리는 뜻밖에 빨리 끝났다. 점심 먹은 시간으로부터 두어 시간 지났을 뿐인데, 힘 좀 썼으니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그마한 상에 먹다 남은 돼지고기, 쓰고 남은 생선, 지난해 담근 김치 따위를 올려 놓고 소주를 땄다. 뱃속이 정리되지 않은 나는 젓가락도 집어보지 않은 채 이런저런 안줏거리를 챙겼다. 그리고는 명절마다 빠뜨리지 않는 나만의 김치찌개를 끓여 형님들 앞에 올렸다. 김치냉장고에 분명히 있을 묵은지에다 돼지고기 수육을 양껏 넣은 뒤 오랫동안 푹 삶는 방식이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기만 하면, 며칠 동안 기름진 음식으로 속이 니글니글한 사람에게 그만한 안주는 없다. 큰방에서 곯아떨어진 큰형수 코고는 소리를 계곡 물소리 삼고, 창밖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흰구름을 가야금 장단으로 삼아 형제들의 술자리는 깊어갔다.
이윽고, 기어이 나도 자리에 끼었다. 동생 내외가 의령으로 떠난 이후였다. 안주 국물이 얼큰하기도 했고 형제간의 대화가 즐겁기도 해서이다. 아버지 아니 계시고 어머니 아니 계신 명절이라 하여 쓸쓸하기만 하고 슬프기만 하고 외롭기만 하고 섭섭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기에. 중간중간 너스레도 떨고 젓가락 장단도 두드리고 노래도 한 자리 하고, 그러면서 설날 오후의 단조롭고 무미건조함을 눅눅하게 적셔볼 요량이었다. 과일도 먹고 떡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술에 취하여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얹혀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는 어쩐 일인지 술이 깨는 듯하여 영화 <명당>을 다 보고 잤다. 설 연휴는 참 길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카들도 설거지를 도왔다고 한다. 단디 보고 잘 배운 조카들도 고맙다.
2월 6일 마지막 휴일이다. 느지막히 일어나 쌀을 씻어 안쳤다. 본가에서 가져온 탕국을 데웠다. 김치와 나물을 꺼내어 숟가락을 들었다. 속 깊은 곳으로부터 ‘헉!’ 하는 탄식이랄지 울음이랄지 그 무엇이 올라오려는 걸 애써 눌렀다. 이렇게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이렇게 철없음은 깊어지는구나 싶었다. 무책임과 불민으로 점철된 지난날이 불현듯 뒤통수를 때렸다. 이제껏 무엇이 되려는지 모르고 살아왔는데 앞으로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무망함을 어떻게 할지 막막하였던 것이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안방으로 기어들었다. 텔레비전 먹방을 보다가 배가 다시 고파져 12시도 되기 전에 나는 점심을, 둘은 아점을 먹는다.
창밖을 보니 햇살이 무진장 풍요로워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다. 동네 뒷동산 한 바퀴 나란히 걸어본 게 언젯적 이야기인지 어렴풋하다. 한 시간 남짓 걸은 뒤 퇴원 하루 앞둔 어머니께 가기로 한다. 뭘 잘 드시지 않으니 무엇을 사 갈지 요량이 안 된다. 병실에 입원한 네 환자와 그의 문병객들이 둘러 서고 앉아 도토리 묵을 종이컵에 나눠 잡숫는다. 아픈 사람들의 아프지 않은 풍경이 고맙다. 설 차례상 차린 이야기 몇 마디 해 드리고 다시 나선다.
큰형님과 형수는 창원 작은형이 혼자 본가에 주무시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함께 주무셨다. 다음날 오전 내도록 쓰레기 버릴 건 버리고 분리할 건 분리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많이 마셨을 작은형은 오전 9시 조금 넘은 시간에 벌써 창원 도착했노라고 카톡을 보냈다. 부지런하고 동작 빠르기로는 일등이다.
휴일 마지막 저녁은 큰형님 내외와 마주했다. 어렵사리 찾은 상대동 어느 찜 전문점에서 대구볼찜 한 접시에 소주 두 병 나눠 마시고 내친 김에 해장으로 동태탕 국물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2월 2일부터 6일까지 닷새 동안 하루도 술 안 마신 날이 없게 되어 버렸다. 술로 보낸 명절 연휴였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얹혀 귀가한 게 세 번이다. 딴 사람들은 영화도 보았다 하고 유원지 놀러도 갔다 하는데. 나는 병원 두 번 갔다 오고 석갑산 한 번 갔다 온 것 말고는 달리 한 게 없다. 친구들 만난 것도 보탬이 되었으면 싶은데 그건 그렇게 풀이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마지막 날 저녁은 아내가 샀다. 설날 오후 작은 술상 앞에 둘러앉았을 때 작은형이 아내에게 고생했다며 ‘그랑프리’ 상금 5만 원을, 큰형님도 감사하다며 5만 원을 쥐어주셨는데, 그것으로 아내는 밥을 샀다. 형님들은 나 몰래 저들끼리 이러저러하게 말을 맞추어 놓았던 것이고, 그것을 먼저 기억해 낸 작은형이 먼저 선심을 베풀어주셨다. 동생네도 뒤질세라 살림에 도움될 이것저것 물건을 건네주었다. 아무튼 그런 돈으로 저녁을 사는 게 마뜩찮았으나 아내는 기어코 그렇게 하고 말았다. 아내 마음은 좀 편해졌겠는데 이제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 그래도 동기간에 서로서로 이 정도 의리라면 꽤 괜찮다 싶다.
처음 이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을 때 열쇳말은 ‘슬픈 설날’이었다. ‘쓸쓸한’ 맛도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닷새 연휴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니 꼭 슬펐거나 쓸쓸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한 조각으로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가실 분은 가시고 아픈 분은 아프고 남은 사람은 그들대로 재미있게 오밀조밀 살 붙이며 살아간다 싶어서이다. 큰소리로 싸울 일도 없고 작은소리로 시샘할 일도 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에 슬플 게 무엇 있으며 쓸쓸할 게 무에 있으랴, 싶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전에 좋아하던 노래가 있다. 이태호라는 가수가 부른 <상도 벌도 주지 마오>라는 노래다. 가사는 이렇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내몫만큼 살았습니다 /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은 채로 / 이별 없고 눈물 없는 그런 세상 없겠지만은 /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 상도 벌도 주지 마오 //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뿌린 만큼 살았습니다 / 가진 만큼 아는 만큼 배운 대로 들은 대로 / 가난 없고 그늘 없는 그런 세상 없겠지만은 /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 상도 벌도 주지 마오.” 이제 내 애창곡이 될 만하다.
작은형은 박진도라는 가수 노래를 아버지 애창곡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똑똑한 여자>이다. 이 노래를 볼 때마다 아버지는 “제일 깨반하게 잘 부른다”고 하셨다고 작은형은 기억한다. 가사는 이렇다. “똑똑한 여자 똑똑한 여자 / 내 사랑 똑똑한 여자 / 당신은 똑똑한 여자 / 내 사랑 똑똑한 여자 / 이리보고 저리봐도 / 매력이 넘쳐흘러요 / 이 세상에 당신 만나 / 사랑을 알았고 / 행복에 꿈을 꾸며 / 살아가는 남자여 / 그대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 나 당신 바라보면 행복해요 / 업어주고 안아주고 / 당신은 똑똑한 여자 / 똑똑한 여자”
저승에서 이승의 불초한 우리들에게 <상도 벌도 주지 마오>를 부르실 아버지. 이승의 아픈 어머니를 향하여 <똑똑한 여자>를 열창하고 계실 아버지. 그 노래들을 이제 우리들이 우리들을 향하여 날마다 불러주어야 할 듯하다. 설은 다 지나가 버렸고 추억과 그리움만 내 곁에 남았다.
2019. 2. 7.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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