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입니다. 영화 한 편 추천해 드립니다. <말모이>입니다.
말모이는 1910년대에 편찬하려던 최초 한국어 사전입니다. 이 말모이는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주축이 되어 만든 사전입니다.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1930~1940년대 들어 주시경 선생의 동학과 제자들이 다시 사전을 만듭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어렵게 어렵게 사전을 만듭니다. 그러나 광복을 앞두고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중도에 그칩니다. 수많은 국어학자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전은 광복 후에 드디어 완성합니다. 조선어학회를 이은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이 그것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영화 <말모이>는 1930년대에 다시 시작한 말모이 편찬 작업을 다룹니다.
조선어학회를 이끄는 지식인도 나오고 일자 무식 민중도 등장합니다. 처음엔 반일애국지사였다가 변절한 사람도 나옵니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일본 선생이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중학교 교실도 나옵니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선전선동하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도 나옵니다. 당연히 일본 경찰도 등장합니다. 좀 악질입니다. 태어나 보니 일제 강점기여서 자기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불려야 했던 착하고 귀여운 아이와 그 오빠도 나옵니다. 그 오빠의 친구들은 카미가제 특공대에 차출돼 전장으로 갑니다.
지식인은 말과 글이 우리 겨레에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부터 압니다. 그래서 말모이 작업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일자 무식 민중은 난생 처음 한글을 깨우쳐 가면서 그 말과 글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목숨을 바칩니다. 그들이 펼쳐가는 우리말 사랑 이야기는 가슴 뭉클합니다.
조선 팔도마다 각각 다르게 쓰는 사투리를 어떻게 모을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모은 사투리 가운데 어떤 것을 표준어로 삼을지 토론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전국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한국어 교사들이 며칠 동안 밤새워 가며 토론하고 투표합니다. 그들의 눈동자는 말을 지키고 글을 살려야 비로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지금 자기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장차 우리 겨레의 말과 글에 혼과 숨결을 불어넣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화 <말모이>는 2019년 현재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눈곱만큼이라도 우리말과 글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영화 보는 동안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고개를 숙일 겁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겨레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부끄러워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겁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이 말들이 과연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까지 생각해 보신 분이라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쥘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날마다 보는 신문과 방송에서 어떤 말과 글을 쓰는지 단 한번이라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깊은 반성에 젖어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불과 100년 전의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 하나 하나에 겨레 얼이 맺혀 있고 우리글 한 자 한 자에 겨레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국권을 강도 일본에게 강탈당하여 백성들이 지옥과도 같은 삶을 이어나갈지언정 말과 글을 붙들고 있으면 기필코 광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내어 주어도 말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전 재산을 뺏기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더라도 글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굳건한 정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결국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차마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말글살이에서 미국말, 일본말 몇 마디 끼워넣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을 쓸 때 영어나 한자를 섞어 쓰지 않으면 손가락이 부러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국민이 영어와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곡학아세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영어도 배워야 하고 한자도 배워야 하지만, 그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영어를 알고 한자를 알더라도 그것을 아무데나 마구 섞어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송, 신문, 잡지, 거리 간판, 공문서에 영어 알파벳을 그대로 써놓고 모르는 사람을 도리어 무식하다고 면박합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말모이>를 편찬하던 선각자와 민중들이 일본말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면, 지금 우리는 미국발에서 벗어나기 위한 <말모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국어학자들이 조선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면, 지금 우리는 현재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조직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숨 바쳐 우리말과 글을 지켜온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은 한글이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문자를 가진 문화민족의 긍지를 이어나가는 길입니다.
영화 <말모이>는 우리말과 글에 관련한 역사와 주장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사이의 연결이 재미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구석구석 재미난 장면도 많고 감동적인 장면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일어날 개연성이 아주 높아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로는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배우 한 명 한 명은 개성은 강하지만 <말모이>를 향한 일관된 주제에 몰입하는 듯합니다. 배신자도 등장합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렁이에서 어느 순간 과거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진실에 직면하여 깨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당시 어렵고 힘들던 시기를 살아간 민초들의 생생한 민낯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웃다가 울다가 하게 만듭니다. 천연덕스러운 연기 덕분일 겁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조선으로 되돌아간 느낌도 받을 겁니다.
《우리말 큰사전》에 대해 설명해 놓은 걸 옮겨봅니다.
‘현대에 표준으로 쓰이는 순조선말, 한자말, 외래어, 숙어, 각종 전문어들’과 ‘이두말, 옛 제도어, 사투리, 변말, 곁말 및 유명한 땅이름, 사람이름, 책이름, 명승고적의 이름’들까지 망라한 사전이다. 총 수록어휘는 16만 4125개에 달한다. 1929년 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1936년 조선어학회에서 편찬작업을 시작하였다. 1942년 가을까지 약 1/3의 작업이 완성되어 일부가 조판에 들어갔으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1945년 10월 3일 서울역 창고에서 원고를 찾아 다시 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1947년 10월 첫 권이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고, 1957년 10월 9일에 마지막 권인 6권이 간행되며 작업이 완성되었다. 마땅한 백과사전이 없었던 당시에 언어사전 이외의 기능까지도 수행한 사전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완성되었으며, 만들어진 뒤에는 한글에 대해 더 넓은 지평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다음백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하여 사전편찬 작업이 중단됐습니다. 1942년 가을이었습니다.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해온 작업의 결과물인 원고를 잃어버렸습니다. 광복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우리말 사전(말모이)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고생해야 했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원고를 광복 후 두 달도 채 안 된 10월 3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합니다. ‘발견되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겁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많은 학회 회원들이 잡혀갈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엄청난 열정과 노력, 그리고 희생으로 수집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한 국어사전 원고를 한순간 잃어버렸다가 어떻게 되찾았을까요. 영화는 그 부분을 탁월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복원해 줍니다. 영화적 상상력의 결과이긴 하지만 정말 감동적입니다. 명치 끝을 아리게 하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어느 신문 기사 한 구절도 옮겨 봅니다.
“나이와 성별, 지식 유무를 떠나 조선인이기에 ‘말모이’에 마음을 모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말이 왜 민족의 정신인지, 사전을 만드는 것이 왜 나라를 지키는 일인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더불어 역사는 위인들의 것이 아니라 결국 보통 사람들의 작지만 큰 선택들로 이뤄지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진하게 다가온다.”(국민일보)
‘가네야마’가 될 뻔한 김순희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말과 글은 바로 저 어린 아이의 맑은 웃음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주말에 영화 한 편 보시지요.
2019. 1. 11.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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