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4일 군산 선유도에서 찍은 해넘이입니다. 한해 동안 열심히 사신 모든 분께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해마다 연말쯤 신문을 보면 한 해 동안 있었던 국내외 정치 소식, 경제계 소식, 체육계 소식, 문화계 소식 들을 열 개씩 묶어 ‘10대 뉴스’라는 걸 발표합니다. 바로 그해에 있었던 일인데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런 기사를 보고 불현듯 ‘아차, 이런 일도 있었지!’라며 깨닫곤 합니다. 그러면서 한 해가 그렇게 저물어가는 걸 느낍니다. 이 10대 뉴스를 잘 모아놓으면 훌륭한 역사 교과서가 될 겁니다.
12월을 보내면서, 문득 나도 나와 관련한 소식 몇 가지를 정리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년 동안 바쁘게 지내온 삶을 정리해 볼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꼽아 보니 서너 가지는 생각납니다. 언론사들처럼 10대 뉴스는 애시당초 안 되겠고, 생각나는 만큼이라도 정리해 봅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 2018년을 돌이켜 본다면 어떻게 회고할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1. 결혼 20돌
결혼기념일 하루 앞둔 6월 13일 아시아레이크사이드 호텔에서 세 가족이 모여 조촐하고 의미있게 기념했습니다.
올해는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20돌 되는 해입니다. 1998년 6월 14일 진주시 장대동 원예농협 2층 화이트 웨딩홀에서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경기도 안산에서 왔습니다. 아내의 가족과 친척들은 새벽 5시쯤 버스를 타고 진주까지 왔습니다. 그분들은 결혼식 마치고 밥을 먹자마자 다시 먼 거리를 달려갔을 겁니다. 아내의 친구들은 앞날 우리집에서 하루 묵었습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그 고마움을 기억하며 더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00년 아들을 낳았습니다. 결혼 후 바로 임신을 하지 않는다 하여 어머니께서 남성당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신안동 어느 산후조리원에서 일주일 입원했다 퇴원했습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아픈 날도 제법 많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우리 집 쪽에서는 다섯 번째 손자였지만 아내의 집 쪽에서 보자면 첫 손자였습니다. 외가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뿐만 아니라 삼촌, 이모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결혼 당시 저는 경남일보 기자였습니다. 경남일보 노동조합 일을 하다가 2000~2001년에는 위원장까지 했습니다. 2003년 회사가 어려워져 구조조정할 때 가장 먼저 사직서를 냈습니다. 부부만 살 때는 어떡하든 버텼는데 아이가 생기고 보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말 못할 사연이 많습니다. 창원에 있는 뉴시스 경남본부 기자가 되었고 우리는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뉴시스도 경영이 어려워져 월급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듯합니다. 모교인 경상대에서 홍보팀장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몇 번 망설이다가 원서를 넣었습니다. 2004년 3월부터 지금까지 경상대 홍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창원으로 가고 다시 진주로 오는 과정에 고마운 분이 많습니다.
아내는 결혼 전 에스콰이아라는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진주로 내려왔습니다. 20년 동안 아내가 해본 일의 종류를 저는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식당 아르바이트는 기본이었습니다. 진주시청ㆍ경상대 등에서 서류 정리 아르바이트, 골프장 캐디, 아이티(IT) 기업 직원, 학습지 대리점 직원, 사회복지단체 계약직, 야쿠르트 아줌마 등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한번도 제가 소개해준 적은 없습니다. 벌이가 시원찮은 남자에게 시집 와서 갖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습니다. 그 고생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부터 다니던 직장도 12월 31일자로 그만둬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볼 때마다 늘 미안합니다. 착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기까지 한 아내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늘 그때뿐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올해 6월 처음으로 세 가족이 호텔에서 외식을 했습니다. 우리 외식은 늘 돼지고기 삼겹살이었는데 이날만큼은 소고기 스테이크에다 포도주도 한잔 곁들였습니다. 예쁜 꽃바구니도 옆에 놓았습니다. 건강하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데 대해 서로 감사한 날이었습니다. 따로 선물은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한계입니다. 앞으로 30년, 40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잘 모릅니다. 20년까지 함께 살아온 것이 그저 고맙습니다. 주변에서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눠주신 여러분이 고마울 뿐입니다.
2. 아들 대학 입시 합격
경상대 합격 발표하던 날인 12월 14일 오후 군산 선유도에서 해넘이를 배경으로 기쁘게 한 장 찍었습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이 대학입학시험에서 합격했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학과로 가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히포(HIPPO)에서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던 아들은 제 성적을 가늠하여 전국 6개 대학의 일어 관련 학과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수시에서 승부를 내기로 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자기소개서를 번번이 수정하라고 하신다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주 잘 썼습니다. 떨어지더라도 책임지겠다며 선생님과 타협하여 겨우 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 경북에 있는 대학, 경기도에 있는 대학에서 합격자를 발표했습니다. 모두 떨어졌습니다. 경상대와 서울에 있는 대학의 안산캠퍼스, 또다른 서울에 있는 대학의 천안캠퍼스가 남았습니다. 경상대에는 1차에 합격하여 면접을 보았습니다. 면접을 본 아들 표정은 밝지 않았습니다. 준비한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12월 13일 안산에 있는 대학에는 떨어졌습니다. 천안에 있는 캠퍼스는 10명 모집하는데 예비 12번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날 경상대도 발표합니다.
우리는 12월 14일 가족 여행을 떠났습니다. 군산이 목적지였고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볼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날은 경상대가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입니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가족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디에든 합격만 하면 된다고 했고 만일 안되면 정시에 도전하면 된다고 했고 만일 안되면 재수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순서입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므로 직장을 바로 얻어도 되고 군대를 가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된 자로서 아들이 인생의 첫 큰 관문을 무난히 통과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진안마이산휴게소를 지나고 있을 즈음 아들의 휴대폰 단체 카톡방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경상대가 오전 10시경 합격자를 발표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대학이 동시에 합격자를 발표했습니다. 합격한 아이, 예비번호를 받은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확인한 것을 올리는가 봅니다. 아들도 스마트폰에서 제 수험번호를 입력했습니다. 수험번호를 입력할 때부터 결과를 알게 되기까지 30초 남짓 동안 저는 운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합격을 하지 못하고 예비번호, 그것도 후순위를 받지 않을까 싶었던 겁니다. 그 순간 실망하고 낙망하여 눈물 흘리게 될 아들과 아내를 태우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아득하던 것입니다.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아들은 제 내신 등급이면 무난하리라 장담했었지만 당락의 절반을 좌우하는 면접을 준비한 만큼 못했다 하기에 반 이상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붙었어요!”라는 아들의 목소리는 달콤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들의 대학 합격 축하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떨어졌더라면 대책회의여행이 될 뻔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서울대도 가고 연고대도 가고 인서울(In Seoul)에도 가는데, 저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어떤 대학으로 가느냐보다 대학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행 다녀와서 12월 17일 월요일 오전 9시 30분 은행 문 열자마자 등록예치금 10만 원을 납부했습니다.
가족 여행 중에 아이는 비록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원서를 넣은 대학 캠퍼스를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군산에 있던 우리는 부여를 갔고 부여 가는 길에 아들의 소망을 들은 우리는 다시 천안으로 갔습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의 천안캠퍼스를 가보기로 한 겁니다. 이제 경상대로 가기로 마음 먹은지라 그 정도의 소망을 못 들어주랴 싶었던 겁니다. 인서울 대학교의 지방 캠퍼스는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습니다. 건물마다 문이 잠겨져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얕잡아보았던 제 스스로 미안해졌습니다.
그 대학은 10명 모집에 10명을 우선 합격시켜 놓았는데 등록예치금을 받고 보니 많은 학생이 다른 대학으로 갔나 봅니다. 12월 20일에는 아이의 예비 번호가 12번에서 5번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그래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지난해에는 예비 15번까지 합격했다고 했거든요. 12월 26일 저녁에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대학의 제4차 추가합격자 발표에서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참 대단한 일입니다. 짧은 시간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겪은 아들은 결국 경상대를 선택했습니다. 10명을 만나 물으면 8-9명은 잘한 선택이라고 말할 겁니다. 저는 수시모집 원서 넣은 6개 대학 가운데 단 한 곳 합격했다는 말보다는 그래도 두 군데 합격한 대학 중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입학했다는 말을 아들이 할 수 있게 된 것이 퍽 다행이다 싶습니다. 수능 치르는 아이를 응원해주고 합격을 빌어 주신 많은 분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3. 우리말 지킴이 선정
우리말 지킴이에 뽑혀 경남인터넷방송 '경남인'에 출연하였습니다. [보러가기: https://goo.gl/5rNNgD]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에서 저를 ‘2018년 우리말 지킴이’로 뽑았습니다. 한글날 며칠 전입니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은 ‘우리말과 글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신념으로 1998년 5월 창립한 시민사회단체로서 1999년부터 해마다 한글날에 우리말 지킴이와 헤살꾼을 발표해 오고 있습니다. 저를 우리말 지킴이로 뽑은 것은, 2017년 11월말에 <요즘 우리말께서는 안녕하신가요?>라는 책을 낸 덕분일 겁니다.
모임에서는 저에 대하여 “경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경상대학교 홍보실장으로 일하면서 고(故) 김수업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모시고 진주지역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회보 편집을 10여 년 동안 했다.”고 밝히고 “그리고 지금은 다음 블로그 ‘글쓰는 삶, 생각하는 삶’이란 곳에 우리말을 살리고 바르게 쓰는 길을 알려주는 글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모임을 이끌고 계신 이대로 선생님께서 저를 우리말 지킴이로 추천할 것이니 그동안 활동한 해적이를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그럴 깜냥이 아니라고 정중히 말씀드리고 활동 내용을 보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 이런저런 언론에 보도되거나 제가 제 누리방에 올려놓은 것들을 바탕으로 결국 저를 우리말 지킴이로 뽑았습니다.
우리말 지킴이로 뽑힌 이야기를 보도자료로 만들어 언론사에 뿌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스스로 보도자료로 만들 때 아주 많이 낯간지러웠지만 그렇게 하는 일조차 우리말 살리는 일에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썼습니다. 많은 언론에서 제 이야기를 보도해 주셨습니다. 엠비시(MBC)경남, 케이비에스(KBS) 진주방송국에서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다시 엠비시경남은 일주일 동안 날마다 열 번 방송하는 ‘엠비시 캠페인’에 저를 불렀습니다. 서경방송에서도 뉴스인이라는 대담 프로그램에 저를 불렀습니다. 경남일보에서는 인터뷰 내용을 지면에 싣고 동영상을 유튜브에도 올렸습니다. 경남도청 인재개발원에서는 공무원 교육에 저를 강사로 불렀습니다. 청소년신문 필통에서도 저를 강사로 불렀습니다. 경남도청에서 제작, 방송하는 경남인터넷방송 경남인에도 5분 동안 소개됐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한다고 해주셨습니다. 먼데서 방송 보고 일부러 전화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좋은 일 한다는 격려는 힘이 되었습니다. 말할 때나 글 쓸 때 제가 생각나서 조심스러워진다고 말씀해 주실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유명인이 되었다며 사인을 해달라고 농담을 건네는 분도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제 주위에 계신 분들이 저를 떠올릴 때마다 몇초 동안이라도 우리말과 글을 생각해 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매우 큰 부담도 갖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모임에 소속되어 제 할 일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어 제 혼자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큰 목소리를 내기보다 작은 소리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마저 다른 일에 밀리고 직장일에 치여 예전만 못합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언제든 어디에서든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고 가꾸고 되살려 나가는 일을 해 나가리라 다짐합니다. 저를 우리말 지킴이로 뽑아주신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과 축하, 격려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4. 큰들 마당극 34회 관람
수능시험을 치른 아들, 아내와 함께 11월 17일 진해에서 열린 오작교 아리랑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저에게는 올해 서른두 번째 관람이었습니다.
저는 2018년 한 해 동안 극단 큰들 마당극을 서른네 번 봤습니다. 오작교 아리랑, 효자전, 최참판댁 경사났네, 남명을 산청, 진주, 하동, 사천, 남해, 진영, 창원, 거창, 진해, 경상대에서 보았습니다. 주로 주말 상설공연장에서 보았고 주중에도 휴가 내어 가보았습니다. 5월 19일 산청동의보감촌에서 효자전을 본 것이 처음입니다. 12월 13일 진주 초전동 실내체육관에서 남명을 본 게 올해 마지막 관람입니다. 지난해 큰들 창립 33주년 정기공연까지 합하면 지난해와 올해 35회 본 것입니다.
그리고 큰들 마당극 관람 후기를 열심히 썼습니다. 정말 짧게 아무렇게나 쓴 것을 빼고서도 35편이나 됩니다. 200자 원고지에 썼다면 900장이 넘습니다. 사진도 열심히 찍었습니다. 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과 글은 제 누리방에 모조리 올렸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까닭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누리방에 모아 놓은 글과 사진이 어느 순간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날로그 세대의 본능적인 공포증입니다. 그래서 저는 글과 사진을 가지런히 모으고 교정을 하여 책으로 묶었습니다. 정식 출판은 아닙니다. 그저 아래한글 무른모에서 이리저리 엮어 복사점에서 인쇄하여 제본한 것이지요. 저에겐 당연히 큰 선물이지만 극단 큰들에도 자그마한 추억이 되겠다 싶어 몇 권 제본해 드렸습니다. 큰들은 식구가 많은지라 몇 권 가지고는 모자랄까 봐 추가로 몇 권 더 인쇄해 달라고 하여 하는 김에 해드렸습니다. 물론 추가로 해드린 건 인쇄비, 제본비를 받았습니다.
한 해 동안 큰들 마당극을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닐 수 있었던 게 고맙습니다. 어떤 분은 주말마다 낚시를 가고 어떤 분은 틈만 나면 영화를 보고 또 어떤 분은 기회를 잘 얻어 국내외 여행을 즐깁니다. 저는 마당극을 선택한 겁니다.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 어떤 때는 토요일만, 또 어떤 때는 일요일만 산청으로 하동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저의 환경, 이를 테면 고3이던 아들의 바쁜 학교 생활과, 집을 팽개치고 무작정 자동차 시동부터 거는 저를 무던히 지켜 보아준 아내, 이런 것들이 무척 고맙습니다. 아내도 저와 함께 열 번 정도는 보았을 겁니다. 산청, 하동, 남해, 사천, 진영, 창원으로 함께 갔습니다.
같은 작품을 몇 번 되풀이 보면서 많이 웃었습니다. 코끝이 찡하기도 했습니다. 부부의 주말 나들이로 제격이었습니다. 동네 이웃들과도 여러 번 갔습니다. 그런 분 가운데 몇 분은 얼떨결에 마당으로 불려나가 단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재미있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그런 분 가운데 많은 분이 극단 큰들의 후원회원이 되었습니다. 큰들은 제 소개로 후원회원이 된 분이 일곱 분이라고 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저로서는 보람 있는 일입니다.
큰들 마당극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열 번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유쾌합니다. 감동적입니다. 큰들은 한 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고 열 번 생각해도 우리 지역의 보배입니다. 우리나라의 보물입니다. 우리 겨레의 자랑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마당극 속에서 우리 시대 우리들이 배우고 느끼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보입니다. 보면 볼수록 더 크게 다가옵니다. 제가 마당극을 보는 까닭입니다.
올 한 해는 큰들 덕분에 많이 웃고 많이 배웠습니다. 눈물도 참 많이 흘렸습니다. 가족과 함께, 좋은 벗들과 함께 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큰들 단원들과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기운을 늘 내뿜고 다니는 분들이어서 제가 행복에 감염됐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에도, 올해만큼은 아니라도 마당극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당극에서 들려주고 싶은 또다른 이야기를 제가 들을 수 있기를 빕니다. 큰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공연하러 가는 길 마치고 돌아오는 길, 공연 보러 가는 길 보고 돌아오는 길 모두 즐겁고 유쾌하고 또한 안전하기를 기원합니다.
5. 치아 치료
4월 11일 윗니를 고정할 뼈가 부실하여 왼쪽부터 인공뼈를 삽입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 잇몸이 붓지 말라고 테이프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병원 가기를 좋아하는 분은 없습니다. 환자로서든 보호자로서든 문병인으로서든. 그중 치과는 더욱 가기 싫습니다. 무섭습니다. 치과 치료 도중에 들리는 기계음 때문일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치과는 정말 무섭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치료로도 끝날 것을 치과 가는 걸 미루고 미루다 병을 더 키웁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그럴 겁니다.
대략 2012년경부터 치과를 갔습니다. 이가 심하게 흔들리고 밤새도록 아프도 심지어 피가 날 때 갔습니다. 의사는 ‘발치’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해에 하나씩 네 개를 뽑았습니다. 뽑을 때마다 울었습니다. 반성했습니다. 그런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속으로는 사랑니와 맨안쪽 어금니 한두 개 없다고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탓입니다. 이런 시건방이 없고 이런 무식함이 없습니다.
2017년 10월 추석 무렵 드디어 큰 사달이 났습니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신호가 왔습니다. 11월경 벼르고 별러 치과에 갔습니다. 의사와 긴 시간 상담했습니다.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오금이 저렸습니다. 명치 끝이 아팠습니다. 아래위 오른쪽 왼쪽 모두 6개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잇몸이 약하여 그대로 둔다면 그 옆의 이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즉 6개를 발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정리해야 했고 치료에 드는 비용도 감당해야 했으므로 저는 시간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집에 신고하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드디어 1월 2일 병원으로 갔습니다. 2018년 올해 반드시 해야 할 일 목록 1순위에 올려둔 것입니다. 앞으로 어찌 되든 어쨌든 병원에 가야 해결책이 나오는 일이었던 겁니다. 다시 한번 자세하게 상담했습니다. 치료 기간과 비용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1월 15일 오후에 치과에 갔습니다. 잇몸을 마취하고 6개를 뽑았습니다. 2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슬픔과 아픔, 그리고 상실감과 후회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치료 과정을 머리에 떠올리며 두려움에 젖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이 6개를 뽑은 뒤 음식물을 씹지 못할 것에 대비한 임시 틀니도 만들었습니다. 틀니가 잇몸에 딱 들어맞지 않아 몇 번 치과를 갔습니다. 잇몸뼈가 부실한 윗니 쪽에는 인공뼈를 양쪽에 넣었습니다. 한쪽 수술하는 데 2~3시간 걸렸습니다.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 잇몸 속에 쇠기둥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7월 30일 마침내 아랫니는 임플란트 수술을 완료했습니다. 그동안 아래위 틀니 끼웠다 뺐다 하느라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는데 아래 틀니는 따로 잘 보관했습니다. 여섯 달 뒤에 윗니 임플란트하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2019년 1월 말에 치과에 가면 됩니다.
2018년은 저에게 축복 같은 해입니다. 치과와 친해지게 된 잊지 못할 해입니다. 비록 아직은 틀니를 끼우고 밥을 먹고 밥 먹은 뒤 곧바로 틀니를 세척해야 하는 불편함이 존재하지만 치과 치료 덕분에 삶의 질이 한층 윤택해졌습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강한 살과 뼈에 쇠나사를 10개나 박은 채 살아야 하지만 그것마저 못하는, 정말 못하는 분들이 많은 세상에서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걸 깨달은 해입니다. 또 있습니다. 임플란트 수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도 많겠지만 그것이 수술인 이상 위험하고 두려운 겁니다. 그것을 무사히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해주신 유능하고 친절하고 자상하고 심지어 멋지기조차 한 의사를 만났다는 것도 저에게 축복입니다.
5~6년을 바보처럼 견디고 버티고 참으며 살던 사람에서, 아프니까 병원 가고 더 아프면 수술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을 전환한 사람으로 바뀐 해가 2018년입니다. 주변에 이 아프다고 말하는 분 있으면 등 떠밀어 병원부터 가라고 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바보처럼 살지 말고 현명하게 살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변에 치과 다니면서 힘들어 하거나 치과 갈 일 앞두고 무서워하는 사람 있으면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2018년은 저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내년 1월말 위 잇몸 임플란트 수술 앞두고 정말 전혀 두렵지 않느냐구요? 아뇨! 여전히 무섭습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두려움과 무서움을 끊고 제 발로 걸어갈 겁니다. 저를 위한 일이니까요.
제가 추구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숟가락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부를 수 있기 위하여는 평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몇 해 전 여름 하동에 사는 선배 집에 놀러가서 놀던 모습입니다.
이렇게 2018년에 저에게 일어난 중요한 일 다섯 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시시한 맹물 같은 이야기입니다. 10년 뒤, 20년 뒤에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감정을 이렇게라도 정리해 놓고 보니 뿌듯합니다. 더 많은 자잘한 이야기들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놓고 보니 온통 고마운 일뿐입니다. 2019년 새해엔 올해보다 더 잘 살고 더 열심히 살 자신이 솔직히 없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행운유수할 듯합니다. 그렇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내고 가야 할 곳은 가고 해야 할 말은 하면서 살겠습니다. 좀 촌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아끼고 부지런하고 곱고 어질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8. 12. 30.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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