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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나의 ‘등등 동지’

by 이우기, yiwoogi 2018. 10. 28.

일곱 번째 하동 나들잇길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 선배누나형님인 강경향 팀장님과 함께였다. 내가 운전하지 않고 가는 첫걸음이었다. 동행이 있었던 건 아내, 김태린 민예총 진주지부장 다음이었다. 악양면 평사리 근처에 집을 지어놓고 사는 대학 한 해 선배 김순남 형님을 만나기로 한 것도 처음이었다. 간다 간다 하다가 기어이 해 넘기기 전에 이 형 집에 가게 됐으니 이 또한 큰들 마당극 덕분이겠다.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 해 선배인데 졸업은 같은해 여름에 하였다. 형이 공부를 가장 잘했고 그다음이 나였다. 하여 어딜 가면 나는, 입학할 때 과 수석을 했고(사실이다!), 졸업할 땐 2등을 했으니 그럭저럭 공부는 잘한 것 아니냐고 눙을 친다. 그해 여름 우리과에서는 3명 졸업했다.

 

가는 길…. 진주~하동 2번 국도는 찬란한 가을을 만들고 있었다. 나무들은 나무들대로 풀들은 풀들대로 제각기 예쁜 가을을 빚느라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뒷산마다 앞뜰마다 감나무는 어찌 그리 많던지. 하동 왕감은 예부터 알아주고 앞으로도 그 명성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이날 하루 가는 길, 오는 길 합하여 내 눈에 들어온 감은, 세어보지 않았고 세어볼 수도 없었지만, 모르긴 해도 수십만 개는 되지 않을까.

 

황토재 넘어 하동읍내 지나 섬진강변을 달린다. 길이 넓어진 덕분에 강물을 바로 내려다볼 수는 없었지만 벚나무들의 붉게 물든 잎사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단풍이 이월 봄꽃보다 붉다)고 했던가. 그 미치도록 예쁨도 이번주가 끄트머리일 듯하다.

 

주소를 찍어 찾아간다던 형님 집은 뜻밖에 찾아지지 않았다. 회남재 아래에 웅크리고 앉은 한 칸짜리 기와집을 그렇게 찾기 어려웠던 것은, 오락가락한 비 때문도 아니요, 제 역할 충실히 한 네비게이션 때문도 아니라, 오로지 그동안 성의 없이 건너뛰어온 그와 나 사이의 세월의 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방 옆에 냉장고 있고 거실에 밥상 하나 놓였고 저쪽 구석엔 세탁기가 들어앉아 있으며 이쪽은 잠자는 방인데다, 아뿔싸 남으로 난 거실 문을 활짝 여니 악양면 등촌리 일대 산자락과 하늘과 구름이 한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 기막힌 하늘의 은혜 아래아래에 배추 몇 포기를 비롯해 게으름 피울 줄 모르는 형의 손길과 숨길 받아 먹는 채소들이 나장나장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세 사람이 한 차에 타고 마당극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간다. ‘사랑채라는 밥집은 아내와 함께, 김 민예총 지부장과 함께, 그리고 이날 세 번째 간 곳이다. 공연장 부근 주막으로 가려던 것이 카드결제가 될지 말지, 방이 있을지 말지(날씨가 제법 차가웠으므로) 싶어 그냥 이 집에 들어갔다. 손님이 많았다. 하동 막걸리 한 되 반에 파전에 도토리묵에 떡갈비에 비빔밥에…. 그렇게 먹고 마시다 보니, 벌써 공연 시간이라.

 


길을 나서자마자 길놀이를 준비하고 있는 최참판댁 하인들을 만났다. 아주 짧게 인사 나눈다. 송병갑과 김순남은 오랜만에 손을 잡았다. 서로 눈짓으로, 표정으로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 병갑의 날라리가 길놀이를 신호한다. 여기서부터 제1부 공연이 펼쳐질 용이네 집 앞까지 2~3분 풍악을 울리며 관광객들의 귀를 불러모은다. 우리는 따른다. 나에겐 매우 익숙하고 재미있는 풍경이고 강 팀장과 순남 형에게는 처음이어서 더욱 기대되는 장면이다.

 

강청댁과 임이네의 아슬아슬한 결투가 시작되기 전, 낯선 사람에게도 너나들이를 잘하는 임이네가 관객 한 명에게 술을 권한다. “아이고 박 서방~!” 하면서 다가와 호리병에 든 술을 따른다. 물론 술은 없다. 빈잔에 술이 있다고 가정하고 관객은 그걸 마신다. 다른 사람들은 웃는다. 그때 아이고, 술도 없는데 잘도 마신다!”라며 놀린다. 반대편에서 다른 배우가 박 서방이 연기를 좀 하네!”라며 한술 더 뜬다. 그 박 서방은, 이날은 김 서방, 즉 김순남 형이었다. 형이 연기를 좀 하는 줄 처음 알았네. 옆에 앉았던 내가 그 장면을 찍었다. 나는 이 장면을 여러 번 봤으므로 1초의 망설임 없이 사진기를 들이댈 수 있었다.

 


10분 정도 1부 공연이 끝난 뒤 2부 공연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대개 풍물소리 따라 자리를 이동하지만 나는 샛길로 좀 서둘렀다. 자칫하다간 키 작은 우리가 맨 뒤에서 까치발을 해가며 1시간 동안 공연을 볼지 몰라서이다. 내가 모시고 간 두 분 관객이 좀 편안하게 보게 하려고 맨 앞자리를 잡아 주었다. 나보다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한 관객도 몇 명 있었다. 졌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는 관객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 장면에서 관객이 배우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전체 관객이 하나 되어 태극기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쳐야 할 때도 있다.

 

최참판댁 재산을 가로챌 꿍꿍잇속을 꾸미고 있는 조준구와 그의 부인 홍씨가 최참판댁에 나타나서 하인들을 점호한다. “김씨, 이씨, 박씨, 최씨, 어중이, 떠중이, 개똥이, 소똥이, 말똥이, 닭똥이, 어쩌고 저쩌고하다가 맨 마지막엔 기타 등등이라며 꼭 한 남자 관객을 지목한다. 지목당한 관객은 어리둥절하겠지. 그때 조준구가 등등아, 아랫목에 불은 지펴 놓았느냐?”라고 묻는다. 어떤 관객은 ~!”라고 말하고 어떤 관객은 , 확실히 지펴 놓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관객은 부끄러워 말을 잘 못하기도 한다. 조준구가 나지막하게, 다른 관객들도 다 들을 수 있게 좀 도와 주거라!라고 한다. 

 

그런데, 이날 영광스럽게 기타 등등에 지목된 사람이 순남 형이었다. 1부에서 박 서방으로 지목당할 때부터 배우들이 눈여겨봐 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우연의 연속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우연이라고 본다. 아무튼 양산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형은, 악양골에 찾아든 지 몇 해 만에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게 되었고 그 첫 관람에서 기타 등등에 뽑히는 행운(!)을 얻었다.

 

기타 등등의 역할은 아랫목에 불을 지펴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간도로 갔던 서희가 장성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길상과 결혼을 한다. 결혼식 날 신랑, 신부 맞절을 하려는데 신랑이 없다. 이때 기타 등등은 신랑이 되어 마당으로 나간다.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우리 순남 형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과연, “신랑 여깄네~!라며 강청댁과 용이가 순남형을 지목한다. 양산에 있는 다른 분들에게 극단 큰들 마당극의 주요 장면 사진을 열심히 퍼나르던 순남 형은 어리둥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신랑이야? 이런 표정. 대학시절 6.29선언을 들었을 때도, 이십 몇 해째 함께 사는 형수님이 사랑을 고백했을 때도 저런 표정은 나오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형은 끝까지 발뺌을 하면 마당극 진행에도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400명 남짓 되는 관객들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는지라, 용기 백배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신부와 맞절을 하고 댕기풀이를 한다. 드러누워 발바닥을 맞으며 신부 서희에게 노래 좀 불러봐~”라고 외친다. 많이 해본 연기 같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긴 것 같기도 하다. 관객들이 가장 많이 웃고 박수치는 명장면이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끄러움 무릅쓰고 한마디 뱉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순남 형은 그런 것쯤은 우습게 해내는 분이다. 그러니 이날은 제대로 잘 걸린 것이다.

 

기타 등등이 해야 할 마지막 역할이 남았다. 독립군이 된 길상과 동지들이 사격연습을 할 차례다. 이때 그냥 기타 등등이었던 관객이 등등 동지로 나타나서 사격 시범을 보여야 한다. 그 장면을 기대하며 순남 형 쪽을 보는데 사람이 안 보인다. 아뿔싸. 눈치 채고 달아났을까, 화장실 갔을까. 큰들 배우들은 이런 저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보았을 터여서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잘도 이끌어 가겠지만, 괜히 내가 안달이 났다. 전화를 두세 번 하니 화장실 갔다가 쫓아온다. 점심으로 마신 막걸리 덕분이다.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싶어 부리나케 달려오는 형에게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라고 속여 놓고 얼른 자리에 앉으시라고 했다. 하하하.

 


등등 동지가 되어 마당에 나타난 순남 형은, 과연 기대한 대로 권총도 제대로 뽑을 줄 알고 사격도 잘하였다. 자세하게 본 사람은 알겠지만, 권총을 쏘면서 손목이 약간 뒤로 젖혀지는 반동도 세밀하게 연기하였다. 그런 등등 동지의 총알에 일본군인 한 명이 맞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터이다. 일본병사가 뒤에 숨었다가 등등 동지가 쏜 총을 맞고 마당으로 뛰쳐나와 숨을 거둔다. 하지만 그 일본병사가 죽어가는 건 줄 모르는 순남 형은 일본병사를 향하여 겨눈 총을 거두지 않고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진정한 독립군의 면모를 보여준다. 155번째 등등 동지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도 아는 첫 등등 동지이다. 마당극이 끝나고 최참판댁 근처를 걸어가는데 관객분들이 연기 잘 봤습니다라며 인사를 건넨다. 단숨에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놀라게 하고 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건 다른 것이었으니. 독립군들이 목숨 걸고 태극기를 가방에 몰래 숨겨와 관객들에게 나눠준다. 독립자금이 모자라서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웬만하면 주변에 아이들에게 먼저 양보하라고도 한다. 그렇게 태극기가 관객들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는 순간, 순남 형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난다. 태극기를 앞으로, 옆으로, 뒤로 골고루 나눠준다. 교실에서 시험지 뒤로 넘기듯 전달 전달만 해도 될 터인데 그는 직접 일어나 한참 동안 태극기를 나눠준다. 과연 등등 동지로서 자격이 충분하지 아니한가. 

 

1020일 산청선비문화축제에서 열린 마당극 <남명>을 보기 위해 일정을 바꿔가며 여러 동료들을 데리고 왔던 순남 형, 그렇게 돌아간 뒤 공연관람료라며 돈을 큰들로 입금해 줄 정도로 세련된 신사 같은 형은 이날 큰들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등등 동지로서는 당연한 도리일 터. 순남 형 덕분에 <최참판댁 경사 났네> 일곱 번 관람 가운데 가장 많이 웃었다. 가장 행복했다.

 


창원 두산중공업 다니는 친구가 있다. 경상대학교 법과대학 졸업생이다. 가끔 진주에서 만나 한잔씩 하고 그의 의령 본가에도 놀러간 적 있다. 이 친구가 좀 늦게 도착하여 멀찍이서 손짓을 한다. 부인과 함께, 창원에서 출발하여(김해였던가? 아무튼) 산청 동의보감촌(그 밑 특리가 처가댁 동네란다)을 지나 함양 용유담(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진)을 거쳐 성삼재를 너머 하동으로 온 것이란다. 마당극 2부를 시작하였을 즈음 도착한 듯하다. 짧은 인사를 나누었는데 헤어질 땐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순남 형 집으로 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 어쩔 수 없었다. 대신 그가 보내온 사진 가운데 두 장을 올려 놓는다. 하나는 열심히 동영상 찍고 있는 내 뒷모습이고 하나는 공연장을 멀찍이서 찍은 사진이다. 어떤 그리움이나 사무침 같은 게 언뜻 지나가는 듯하여 코끝이 찡하다.

 


셋은 다시 차를 타고 형 집으로 갔다. 녹차를 끓이는 동안 냉장고에 있던 멸치볶음, 열무김치, 배추김치를 내어 놓고 정감막걸리 한 병을 꺼낸다. 운전하실 팀장님은 녹차를, 나는 막걸리를 몇 잔 들이켰다. 바깥에선 찬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온갖 짓궂은 장난을 쳤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달고 맛있었고 따뜻했다. 웃음은 헤프다 할 정도였으나 아깝지 않았다. 강경향 팀장이 경상대 기숙사 영양사로 있을 당시 기숙사 관생회장이었던 순남 형은, 점심 먹을 때도 차 마실 때도 그때 기억을 펼쳐 놓느라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은가요? 내년에도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러 올 것인데, 형님이 하동에 와 있기만 한다면 나는 기어이 그 전날 달려와서 밤새 놀고 다음날 같이 손 잡고 공연을 보러 가겠다.”라고.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 돌아보며, 그리고 가끔 하늘 한번 쳐다보며 웃었다. 오는 길은 따뜻했다. 큰들 기획실장이 보내온 무지개 사진을 보면서 큰들의, 마당극이라는 것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무지갯빛 미래를 그려 보았다. 


 2018. 10. 28.

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