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공연하고 있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 가운데 가장 많이 공연한 작품은 <효자전>이다. 2010년 5월 8일 처음 공연한 이후 올 7월 21일 200회를 넘어섰다. 그 이후에도 10월말까지 열두 번 정도 더 공연했다. 횟수를 세는 것 자체가 큰 의미 없을 정도로 최고 인기 작품이다. 남녀노소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지리산 약초골 산청이 극의 배경이지만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먹히는 작품이다. 주제가 ‘효’여서 더욱 그렇다.
산청군 동의보감촌 한의학박물관에 가면 이런 전설을 들을 수 있다. 2층 한구석에 전시해 놓은 모형들 앞에 서면 이런 말이 천장에서 들려오는데 정확하게 어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까먹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약초의 본고장으로 유명합니다. 옛날 산청 지리산 기슭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갑동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랜 병으로 고생하셨고, 효자 갑동이는 열심히 간호했지만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산작약으로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갑동이는 지리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산작약을 찾아냈습니다. 정성어린 효심과 지리산에서 자란 좋은 약초를 드신 어머니는 깨끗이 병이 나았고 어머니는 갑동이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극단 큰들이 <효자전>을 창작하게 된 배경 전설이다. 큰들은 갑동이, 효자, 산작약(작품에서는 산삼)을 열쇠로 삼아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한 시간 짜리 창작 마당극을 세상에 내놓았다. <효자전>은 우리가 익히 아는 소설 <동의보감>과 비슷한 듯하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칭송은 하나하나 헤아리기 어렵다. 불후의 명작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자칫 단조로울 법한 효성 지극한 자식의 이야기도 큰들 특유의 표현 방식으로 풀어내어 1시간 동안 웃고 울리는 리듬을 살려냈다.” “인물들의 거침없는 언동에 웃음이 뒤따라.” “래프팅 전용 배, 노, 사람만 한 산삼 등의 소품 활용, 꽹과리ㆍ장구 등을 쓰는 효과음은 이미 큰들의 장기다.” “한 시간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공연 내내 밀려든 감동과 해학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혼과 열정을 불태워 공연하는 배우들에게 무한한 박수와 격려…” “간만에 눈물 날 만큼 ‘웃음보따리 선물’” “적절한 반전, 할머니의 감초연기, 갑동의 비 오듯 흐르는 땀”(큰들 누리집에 언론보도와 관객 반응을 정리해 놓은 것을 옮김)
나는 이 작품을 여러 차례 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소품의 적절한 활용’이다. <효자전>에는 크고 작은 소품이 수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일반 관객들은 이야기를 따라가거나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되거나 가끔 나오는 음악과 춤에 넋을 뺏기는 바람에 수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소품을 눈여겨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효자전>을 꼼꼼히 뜯어보면 극단 큰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작품을 구성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배우들의 동선과 대사와 몸짓이 소품과 얼마나 적절하게 연결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앞으로 <효자전>을 보려면, 이런 점을 관찰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하다.
고기잡이 배를 젓는 노는 기타가 된다. 이 노의 쓰임은 어디까지일까?
첫째 마당. 천둥벌거숭이로 살아가는 갑동이는 친구들과 고기 잡으러 경호강으로 간다. 이들이 배를 움직이기 위해 갖고 온 ‘노’는 잠시 후 기타가 된다. 기타를 튕기며 뱃노래를 한바탕 신나게 불러준다. 이웃 어른인 임뻥아재가 “월척이다~!” 소리 지르며 쏘가리를 낚싯줄에 매단 채 등장한다. 개구쟁이 갑동이는 임뻥아재가 잡아온 쏘가리를 정확하게 낚아챈다.
임뻥아재가 잡은 월척 쏘가리를 낚아채는 데 한번도 실수가 없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고 착오도 없다. 낚싯줄에 매달린 쏘가리 소품이 바람에 흔들리거나 임뻥아재의 작은 손놀림에도 위치가 바뀔 만한데, 더군다나 낚싯줄에 매달렸으니, 그리하여 한번에 낚아채지 못하고 두어 번 시도할 만도 한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쏘가리를 구워 먹기 위해 마당 가장자리, 관객들 코앞에서 불을 피운다. 쏘가리를 구워먹기 위해 불을 피울 때 쏘가리 입과 꼬리에서는 기다란 쇠고챙이가 나온다. 고기를 걸치도록 세운 작대기는 배를 젓기 위한 노였다. 한 가지 소품이 몇 가지 기능을 한다.
쏘가리를 구워먹다가 임뻥아재의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빼앗긴다.
임뻥아재의 어머니가 대각선 반대편에서 종종종종 달려온다. 3~4초 사이다. 순식간에 쏘가리를 뺏어간다. 쏘가리를 뺏은 임뻥아재 어머니를 향해 갑동이와 친구들이 “할매~!”라고 부르자 뒤돌아보며 “내끼다, 메~롱”하고 가져가 버린다. 그때 할매의 위치는 마당의 가운데쯤이다. 앞으로 누가 주연이고 누가 조연일지를 보여주는 것일까.
다시 갑동이 어머니가 밥주걱을 들고 등장한다. “아재요, 갑동이 못 봤십니꺼?”라는 물음에 임뻥아재는 이미 어른 편인지라 “저기 있네예.”라며 손가락으로 갑동이와 네 명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어머니와 아들들의 쫓고 쫓기는 달리기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밥주걱을 마당 한 켠에 던져놓는다. 아이들을 향해 돌진한다. 두 친구는 들고 있던 노를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고 어머니 양 겨드랑이를 부추겨 공중부양시킨다. 갑동은 어머니의 발길에 차여 넘어진다.
이때 갑동이 들고 있던 노를 어머니가 슬쩍 받아든다. 착오가 없다. 이 장면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로써 처음 들고 들어온 밥주걱을 구석에 내려놓았는데도 아들 친구들을 징치할 때 다시 무기(?)를 들고 있게 된 것이다. 그 노를 가지고 어머니는 아들 친구들의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려주고 한 녀석은 똥침을 날려준다.
갑동이 들고 있는 노를 은근슬쩍 전달받아 아들 친구를 혼내는 데 쓴다.
관객들은 쾌재를 부르며 크게 웃지만, 소품 ‘노’의 공은 대단한 것이다. 어머니는 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던지는데 그 노를 친구 가운데 한 명이 몰래 챙겨 들고 나간다. 마당으로 들어온 소품은 그렇게 이용되고 정리된다.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 치고는, 내가 보기엔 정말 대단한 작전이고 구성이다.
아들 친구들은 그 노를 이용하여 갑동이네 집 대문을 만든다. 아들이 한양에 내의원 시험 치르러 떠나려는데 노잣돈이 없다. 마침내 집안 기둥뿌리라도 뽑아주기로 결심하는데, 아까 그 노가 바로 기둥뿌리 역할을 한다. 어머니는 힘겹게 기둥뿌리를 뽑아준다. 큰아들 귀남을 위해 무엇이든 해준다.
노를 갖고 대문을 만들고, 그 대문의 중간 도막은 말 그대로 기둥뿌리가 된다.
갑동이가 큰아들만을 위해 소 팔고 논 팔고 이제 기둥뿌리마저 뽑아줄 것이냐며 대든다. 형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어머니는 맨처음 갖고 들어온 밥주걱을 주워 들고 갑동이 엉덩이를 때림으로써 상황을 정리한다. 형제가 실랑이하는 위치와 밥주걱이 놓인 위치는, 관객들이 형제간의 다툼을 제대로 인식하고 누구 편을 들 것인지 상황판단할 시간만큼 떨어져 있다. 밥주걱과 노는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기능을 한다. 참 재미있다.
둘째 마당. 임뻥아재 어머니는 치매 환자다. 예전에는 이를 두고 노망이라고 했다. 아들을 아부지라고 하고 똥을 떡이나 돈으로 생각할 정도다. 마당 한가운데 와서 주저앉아 있는데 우편배달부가 온다. 한양 귀남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그때 임뻥아재가 나타나 “어무이, 거기서 뭐합니꺼예?”라고 묻자 “떡 만든다.”라며 똥을 보여준다. 임뻥아재는 기겁을 한다. 그러다가 손에 쥔 편지를 발견하고 기발한 잔꾀로 편지를 받아든다. 자, 마당 한 가운데 눈 이 똥은 어떻게 될 것인가.
관객들은 한양에서 귀남이 보내온 편지에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마당 한 가운데 놓인 냄새나는 똥이 설마 극의 마지막까지 온전히 보전돼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임뻥아재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부지, 떡 먹으라!”고 했다가 관객들에게 “떡 먹을래?”라고 했다가 결국엔 똥덩이를 마당가에 살짝 내려놓는다. 귀남 어머니에게 편지가 왔음을 알리는 장면이어서 똥덩이를 어디에 두는지 살피는 관객은 별로 없을 듯하다.
치매 걸린 할매가 눈 똥은 한참 동안 관객의 눈길을 끈다. 나중에 어떻게 처리될까.
귀남은 어머니에게 돈을 부치라고 했다. 임뻥아재는 “이 촌에서 돈이 오데 있노?”라며 관객들의 동의를 구한다. 이때 그 어머니는 다시 똥덩이를 주워들고 말짱한 목소리로 “아범아, 돈 있다.”고 내민다. 임뻥아재는 코를 감싸쥐고 기겁을 하며 달아나고, 그 어머니는 똥덩이를 들고 마당 오른쪽으로 나가다가 아무 관계도 없는 멀쩡한 악사에게 “아나, 떡 먹어라.” 하며 던져준다. 악사는 징그러운 뱀이라도 만난 듯 몸서리친다. 똥덩이의 존재를 잠시 망각했거나 저 똥을 어떻게 치우려는가 지켜보던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어머니의 치매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소품이 바로 똥덩이였으며, 뒤처리를 웃기고도 깔끔하게 해낸다.
셋째 마당. 귀남은 한양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대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동료 내의원들과 대낮부터 기생집을 찾았다. 주안상이 차려졌다. 대감이란 자가 밥상에 턱 걸터앉으니 주모가 술을 권한다. 호리병과 술잔 몇 개 놓인 술상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상징한다. 주모가 술상을 들고 어지럽게 비틀비틀한다. 취했다는 뜻이다. 관객은 자칫 술병을 깰까봐 조마조마해진다. 1~2초 사이다. 그러나 술병과 술잔은 술상에 붙어 있다. 조금 전 한잔할 때는 붙어있지 않았다. 관객 눈을 속인 것이다. 주모가 술상을 놓치는가 할 때 아슬아슬함을 찰나에나마 느끼게 해준다.
당시 상황을 상징하는 술상. 술상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다.
산청에서 어머니와 갑동이가 돈을 마련해 상경한다. 보따리엔 귀남이 좋아하던 곶감이 들었다. 하지만 귀남은 어머니와 갑동이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외면하고, 어머니 병이 깊으니 진맥이라도 해보라는 갑동을 뿌리친다. 그러다가 곶감 보따리를 팽개치게 되고 곶감이 튀어나온다. 곶감은 귀남이 한양으로 떠날 때 어머니가 애써 챙겨 줄 정도로 좋아하던 것이다. 그런 것도 팽개칠 만큼 귀남은 출세에 눈이 뒤집혔다. 곶감이 상징하는 것은 이들 형제의 우애와 어머니의 사랑과 타향살이하는 귀남의 고향애 같은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팽개친 곶감을 하나하나 주워 담는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곶감은 세 개가 흩어진다. 하나였으면 느낌이 어쨌을까, 열 개 정도 흩어졌다면 다 주워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꼭 세 개다. 왜 세 개일까. 어머니는 곶감을 주워 보따리에 싸면서 “귀남이가 혼자서 타향생활 한다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겄노?”라고 한다. 그 대사 직전에 아무말 없이 곶감을 줍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 시간적 여유를 주는 개수가 세 개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어머니 병은 깊어간다. 어머니는 응급 수레에 실려 등장한다. 병원 침대 머리맡엔 수액(링거) 장치가 달려 있다. 그 링거병이란 바로 조롱박이다. 관객들이 그것을 알아보고는 박장대소를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어머니 병환은 더욱 깊어진다.
응급실로 실려온 어머니 머리 맡에 조롱박 링거병이 걸려 있다.
갑동은 임뻥아재의 제안에 따라 처녀무덤을 파 시체 다리를 가져가려다가(전설의 고향 단골 소재) 실패한다. 갑동이와 임뻥아재는 공동묘지를 찾아가 처녀무덤을 골라내지만 처녀귀신이 따라와 “내 다리 내놔라!”고 하는 바람에 졸도하고 만다.
처녀귀신은 무덤을 지키는 다른 귀신들에게 “얘들아, 왕산으로 이장을 하자. 여기는 터가 안 좋다.”라며 자기가 묻혀 있던 무덤을 번쩍 들고 마당 밖으로 나간다. 귀신이 자신의 무덤을 번쩍 들고 이장하는 장면을 본 관객들은 또 포복절도한다. <효자전>의 소품들이 보여주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상상을 뛰어넘는 그 무엇 때문이다.
넷째 마당. 갑동이는 천신만고 끝에 산삼을 구한다. 그러나 때맞춰 집으로 찾아온 귀남에게 산삼을 빼앗긴다. 귀남은 그 산삼을 대감에게 바침으로써 중병에 걸린 세자를 구완하고 큰 벼슬을 얻을 참이다. 하지만 대감의 배반으로 허사가 된다.
어머니는 마침내 돌아가신다. 어머니 환갑날이 초상날이 되었다. 환갑날 온다던 귀남이 등장한다. 갑동이는 상주로서 상장(지팡이)을 짚고 어머니 상여를 뒤따르다가 귀남이 나타나자 지팡이를 던져 두고 형에게 대든다. 이 모든 게 장남 귀남 때문이었으므로.
저승사자 뒤를 힘없이 따르던 어머니는 자식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저승과 이승이 혼돈되면서 어머니가 아들들 앞에 나타난다. 어머니는 갑동을 먼저 꾸지람한 뒤 귀하디 귀한 큰아들에게 회초리(여기서는 몽둥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를 든다. 그 회초리는 바로 갑동이가 던져둔 지팡이다.
어머니가 들고 큰아들을 혼내는 지팡이는 상여를 따르던 갑동이 짚고 있던 것이다. 지팡이의 쓰임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 왜 지팡이를 내던질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쓸 소품이었기 때문에 적당한 위치에 내려놓은 것이다. 귀남은 지팡이 근처에서 매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귀남이 이놈의 자슥, 내가 오냐오냐했더니 사람 다 베리놨네!”라는 대사를 할 시간 만큼 지팡이는 떨어져 있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된다. 어머니 걸음 속도도 계산에 넣은 듯하다. 그런 것이 눈에 보인다.
어머니는 귀남을 혼낸 뒤 지팡이를 귀남이 무릎 앞에 던져 놓는다. 나중에 분위기가 반전되어 어머니가 저승사자를 쫓게 된다. 이때 다시 이 지팡이를 주워 든다. 마당을 빙 한 바퀴 돈 뒤 마침 알맞은 몽둥이 하나를 발견했다는 듯이 주워 든다. 그것이 있음으로써 쫓는 자의 모습이 더 잘 드러난다. 갑동이 짚고 들어온 지팡이의 쓰임은 매우 요긴하다. 저승사자를 쫓아버린 어머니는 마당 거의 바깥쪽에 지팡이를 슬쩍 던져버린다. 지팡이의 역할은 끝났다.
저승사자 한 명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데리고 갈 사람 명단이 적힌 명부를 가슴에 안고 등장한다. 명부를 안고 키 큰 저승사자 뒤를 따른다. 치매에 걸린 임뻥아재 어머니가 저승사자로부터 명부를 뺏을 시간이 다가온다. 하늘의 비밀이 담긴 명부는 뺏겨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꼭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동이 어머니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두 아들을 꾸지람한 뒤부터는 모두에게 이승, 저승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들들과 임뻥아재와 그 어머니가 저승사자들에게 하소연하며 가까이 다가간다. “한번만 기회를 주이소!”라며. 이때 저승사자들이 훽 뒤돌아보며 오른손으로 장풍을 쏜다. 그러자니 자연히 명부는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야 한다. 순간적인 전환이다. 애지중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명부 관리에 허점이 노출된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임뻥아재의 어머니가 쪼르르르 달려가 명부를 뺏고 만다.
이 명부는 극 흐름의 대반전을 위한 소품이다. 소품의 위치가 앞가슴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조금 바뀐 것뿐인데, 정말 거기서 거기 같은데, 대반전의 서막이 되고 만 것이다. 큰들은 이렇게 짜놓았다. 만약 자식들이 그저 바닥에 엎드려 통곡만 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반전을 어떻게 준비했을까. 복잡한 듯하면서도 쉽게, 쉬운 듯하면서도 잘 모르게 꼭꼭 숨겨 놓았다.
저승사자가 사자명부를 빼앗겼다. 가슴에 안고 있던 것을 어쩌다가 뺏겼을까.
<효자전>은 대단한 명작 마당극이다. 탄탄한 서사구조와 빈틈 없는 대사와 연기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작교 아리랑>이나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처럼 관객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끌어들이는 요소도 없으면서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우스개와 익살과 해학이 넘쳐나는 데도 많은 관객이 눈물짓는다. 그만큼 작품성이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효’라는 주제의식이 강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소품들도 어느 작품보다 치밀하게 배치하고 활용하는 ‘세밀한 부분까지 정밀한’ 작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많은 소품들은 자로 잰 듯이 정확한 위치에 놓여 있거나, 어떤 대사를 할 시간만큼 떨어져 있거나, 관객이 상황판단을 대충이라도 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면서 알게 모르게 툭 떨궈놓거나 짐짓 던지는 척하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마당 밖으로 퇴장할 때는 필요없어진 소품들을 슬쩍슬쩍 주워 나간다. 그러한 것은, 서너 번 봤을 때 보이기 시작했고 열 번 가까이 보니 비로소 그것들의 소중한 가치와 역할과 기능 같은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지 않은 대단한 소품들도 여럿 등장한다. 일반적인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다 말해버리면 마당극 보는 재미가 오히려 반감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 부릅뜨고(그러나 웃음 띠며) 마당극을 보고 있노라면 소품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은 작가와 연출가의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을 현실속 극으로 구현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소품들의 대활약은 큰들 작가와 연출가들의 꼼꼼함, 배우들의 빈틈 없는 연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튼 보면 볼수록 대단한 작품이다. (<오작교 아리랑>과 <최참판댁 경사 났네>의 소품도 말할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이다. <남명>은 이제 시작했으니 좀더 보고….)
2018. 10. 30.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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