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曺植,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1572년 2월 21일(음력 2월 8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ㆍ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ㆍ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숨어서 벼슬하지 않는 선비인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회재 이언적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참봉을 내려주었으나 조식은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 이황의 추천으로 단성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단성현감 사직 시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를 올린다.
(중략)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중략) 자전(紫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려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 가지, 백 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퇴계 이황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였으나 후일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이기(理氣)의 사단칠정에 관한 7차 논쟁을 듣고 물 뿌리고(灑) 마당 쓰는(掃), 쇄소(灑掃)하는 생활 방법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논하며 선비를 참칭한다고 비판하면서 선비관에 대한 차이로 이황과 갈등하게 된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의 문도가 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위키백과에서 간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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