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세월 동안 서로 등 돌리고 원수처럼 지내던 아랫마을과 윗마을. 이 두 마을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이 생겼으니 바로, 아랫마을 총각 남돌이와 윗마을 처녀 꽃분이가 사랑에 빠지고. 설상가상 부모 몰래 혼례를 올리기로 한 것이다. 두 청춘남녀의 예상치 못한 혼례로 양쪽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는데…. 과연 두 사람은 얼어붙은 부모의 마음을 녹이고 무사히 혼례를 올릴 수 있을까?’
이 글은 극단 큰들이 산청군 동의보감촌에서 정기공연 중인 <오작교 아리랑> 소개글이다. 120회 가까이 공연하는 동안 많은 언론에 여러 번 소개되었고 이래저래 입소문도 어지간히 났다. 따라서 이 극의 내용을 아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지 않더라도 ‘아랫마을과 윗마을’ 사람 이야기라면 ‘이게 바로 분단된 우리 조국의 통일 문제를 다루는구나’라고 알아챌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남과 북이 곧 전쟁을 벌이기라도 할 듯이 으르렁거린 적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부터 3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른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봄을 맞이하고 있다. 꽉 막혔던 대화 창구가 열렸고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하는 듯하다. 중간에 미국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남북한 모든 국민들이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현실에서는 이러저러하게 남북 정상회담을 잇달아 두 번씩이나 하고 사상 처음으로 북미 정상회담도 열림으로써 서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마당극에서는 ‘70년 세월 동안 서로 등 돌리고 원수처럼 지내던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무엇을 계기로 하여 서로 화해하고 아들 딸이 혼례를 올릴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심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열쇠는 무엇일까.
이 마당극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이거나 무슨 다큐멘터리이거나 몇 달 동안 이어나가는 연속극이 아닌 이상 공연하는 한 시간 이내에 갈등을 풀어내고 결국은 축복 속에 혼례를 올리게 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예감하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마당극을 보긴 하는데, 과연 어떤 황금열쇠, 만능열쇠로 꽉 잠긴 자물통을 열어젖힐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열쇠는 다름아닌 ‘아리랑’과 ‘버나놀이’였다. 남과 북, 아니지 아랫마을과 윗마을 사람들은 당장 오늘이라도 만나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요이다. 사전에서는 ‘본래 노동요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직업공동체ㆍ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한 노래를 넘어서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노래로 널리 알려졌다.’라고 한다. 한국의 3대 아리랑으로는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 있다고 하는데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참 잘 정한 것 같다.
윗마을 꽃분이 부모와 아랫마을 남돌이 부모가 이들의 혼례장에 나타나 “이 결혼 반대다!”를 외친다. 혼례로 들떠 있는 신랑, 신부와 하객들은 꽁무니를 내뺀다. 양가 부모들은 서로 자기 마을이 잘나고 훌륭하다고 내세우며 기싸움을 벌인다. 서로 자기가 가진 예술적 재능이 훌륭하다며 겨루기를 하고 양가 친척들을 동원하여 대결도 벌인다. 그러나 끝내 마음의 합일점을 찾지 못하여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양가 부모들은 등을 돌린 채 콧방귀를 뀌며 완전히 결별한 듯하다.
이때 꽃분이가 무대 뒤에서 조용히 등장하며 ‘아리랑’을 부른다. 정선아리랑도 아니고 진도아리랑도 아니고 밀양아리랑도 아니다. 그냥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노래를 부르다 말고 꽃분이는 양가 어른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갈라지기 전인 70년 전에는 다 함께 모여 아리랑을 불렀다지요?”로 시작하는 짧은 대사에 모든 게 담겼다. 자기도 모르게 아리랑을 따라 부르던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한민족의 동질성을 부지불식간에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가슴속에 울컥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헛기침을 하는 관객도 더러 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각각 다른 아리랑이 여러 번 연주된다. 그걸 찾아보는 것도 또한 재미있다. 맨 뒤, 두 집안이 화해하고 혼인을 치르면서 놀 때 나오는 아리랑은 어떤 아리랑인지 잘 모르겠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사상 처음으로 한국의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날 오전 9시 30분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문재인 대통령과 역사적으로 만난 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전통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판문점 남측지역 자유의집과 평화의집 사이, 판문점 광장으로 이동했다. 두 정상이 이동하는 동안 양쪽에선 호위무사들이 장방형 모양을 이뤘다. 두 정상이 우리의 전통가마를 탄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통의장대 취타대는 두 정상의 이동 중 남북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아리랑’을 연주했다. 아리랑은 이러한 것이다. 회담이 끝난 뒤 환송행사에서도 ‘고향의 봄’과 함께 ‘아리랑’을 연주했다. 아리랑은 이러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주었다.
꽃분이는, 조금 전까지 서로 재주를 겨루느라 갖고 놀다가 마당에 팽개쳐버린 버나를 주워 돌리기 시작한다. 꽃분이는 돌리던 버나를 시아버지가 될 남돌이 아버지에게 던진다. 얼떨결에 버나를 받아 돌리던 남돌이 아버지는 이걸 왜 내가 갖고 있느냐며 다시 꽃분이 아버지에게 버나를 던진다. 꽃분이 아버지도 본능적으로 버나를 받아 돌린다. 버나는 다시 남돌이 어머니에게로, 다시 꽃분이 어머니에게로 오고 간다. 버나가 오고 가는 동안 닫혔던 이들의 마음의 문이 열린다.
남돌이 어머니가 “이리 갔다 왔다 항께 어쩐지 가슴이 심쿵심쿵하네예!”라고 하자 꽃분이 어머니는 “이렇게 버나가 오고 가고 가고 오고 해도 잘만 돌아가네예.”라고 화답한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버나를 함께 돌리게 되고 양가 부모들의 가슴에 쌓였던 미움, 증오, 갈등 같은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아주 오래전 한마을이었던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묻자 남돌이 어머니는 “왜긴요! 그동안 서로 만나지도 않고 소통을 하지 않아서지요!”라고 내지른다. 남북 정치인들에게 던져주는 일침이다. 남북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대화 없고 소통 없이 꽉 막힌 모든 갈등 구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다. 오고 가고 가고 오면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대화가 이어지고 그러다 보면 다툴 일도 없고 눈 흘길 일도 없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아랫마을 부모와 윗마을 부모 사이에 오고 간 ‘버나’는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양가 부모들이 서로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며 예술적 재능을 겨룰 때 등장한 이 버나놀이란 무엇인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버나를 돌리면서 태어났다는 남돌이 아버지와, 고구려 시대 말 타고 활 쏘던 시절부터 재능을 익혀 왔다는 꽃분이 아버지. 그들이 함께 재주를 뽐내던 이 버나놀이란 무엇인가.
사전은 버릇없이 간단하게 소개한다. ‘남사당패 놀이의 두 번째 놀이. 쳇바퀴나 대접 따위를 두 뼘 가량의 앵두나무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버나재비와 어릿광대가 재담(才談)을 주고받으며 진행된다.’라고 한다. <오작교 아리랑>을 보는 관객들은 ‘버나’라는 것을 알까. 보긴 봤는데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가까이에서 버나놀이를 처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일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2014 진주 솟대쟁이놀이 복원 재현사업’의 하나로 학술행사와 재현 공연이 마련됐다. 재현 공연은 이날 오후 2시 진주성 야외공연장에서 진행됐다. 재현 공연은 들머리판(앞과장)-춤노래마당, 가온누리판(본과장)-재주넘기마당, 회두리판(뒷과장)-놀음놀이마당의 순으로 2시간가량 이어졌다. 들머리판은 놀이의 시작을 구경꾼들에게 알리고 관람 욕구를 부추기는 공연이다. 놀이순서는 당산굿→길놀이→넋전춤으로 이어졌다.
가온누리판은 솟대타기1(중심잡기)→사잇놀이1(죽방울놀이)→솟대타기2(물구나무서기)→사잇놀이2(버나놀이)→솟대타기3(악기연주하기)→사잇놀이3(얼른)→솟대타기4(재담치기)→사잇놀이4(살판)→솟대타기5(쌍줄백이) 등으로 진행되었다.
회두리판은 솟대쟁이놀이 가락의 정수를 모아 엮은 풍물 판굿 공연으로, 이 공연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닫았다. 마지막에는 구경꾼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판 판굿을 벌였다.
자, 가온누리판의 사잇놀이 2에 ‘버나놀이’가 등장한다. 흔히 서커스 같은 데서 한두 번씩 봤음 직한 버나놀이는 우리의 전통놀이였던 것이다. 솟대쟁이패는 1800년대 전후로 진주지역을 본거지로 하여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활동한 전문예인집단을 말한다. 솟대쟁이패라는 명칭은 이 패거리들이 놀이판을 꾸밀 때 한가운데에 솟대와 같은 긴 장대를 세운 뒤,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두 가닥씩 네 가닥의 줄을 늘여놓고 그 위에서 몇 가지 재주를 부린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솟대쟁이패 공연은 1936년 함경도 원산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하게 된다. 당시에 서슬이 퍼렇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일본곡마단에 관심을 돌린 대중들의 외면으로 흥행 실패가 거듭되어 패거리를 지켜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98년 1월 9일 진주 시민들의 힘으로 진주오광대복원사업회가 구성되었고, 뒤이어 제3회 진주탈춤한마당을 통하여 진주의 토박이 오광대가 복원 공연(1998년 5월 23일)됨으로써 솟대쟁이패의 전문직업적인 오광대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솟대쟁이놀이패 안내 자료에서 인용)
이야기가 딴 데로 샜다. 아무튼 큰들은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이어 줄 전통놀이로 ‘버나놀이’를 선택했다. 남과 북이 함께 즐길 만한 전통놀이는 이 외에도 아주 많을 것이다. 윷놀이, 연날리기, 널뛰기, 제기차기, 투호 같은 것에서부터 탈춤놀이, 차전놀이 등등. 이런 놀이 가운데 버나놀이를 선택한 건 무슨 까닭이 있을까.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극의 흐름을 이어가고 그러한 가운데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싶다.
극 속에서 버나놀이는 남돌이 부모와 꽃분이 부모가 서로 재능이 뛰어난 집안이라는 것을 자랑할 때 시작된다. 아주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아버지들이 등장할 때 짚고 있는 지팡이가 바로 버나놀이에 쓰이는 작대기이고, 어머니들이 들고 나오는 손가방이 실은 버나 가방이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아무튼, 일반 사람이 아무데서나 쉽게 보기 힘든 버나를 마당극에서 보는 것도 새롭고 신기한데, 관객들을 신랑댁, 신부댁으로 나누어 버나 이어달리기를 하게 함으로써 버나 체험의 효과도 가져다준다. 꽃분이가 아리랑을 부른 뒤 버나를 돌리다가 이것을 남돌이 아버지에게 던지고 다시 남돌이 아버지가 꽃분이 아버지에게 던지는 장면이 있다. 70년 동안 서로 등 돌리고 원수처럼 살아온 사람이라도 무엇인가가 가고 오고 하다 보면 쌓였던 앙금이 눈 녹듯 녹게 된다는 것을 잘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윷놀이나 제기차기나 투호놀이나 차전놀이나 탈춤놀이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놀이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 놀이임에는 틀림없으나,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이어주고 붙여주고 대화하게 해주는 요소로서는 버나가 일등일 것 같다. 버나놀이는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도 맨 처음 관객과 함께 분위기 돋울 때 등장한다. 큰들 배우들은 죄다 버나돌리기 예인 같다. 정말 잘 한다.
2014년 버나놀이를 본 뒤에 최근 큰들의 마당극에서 다시 버나를 보게 되었다. 이건 어디에서 파는가 싶어 검색해 보니 다양한 가격대의 다양한 제품이 나와 있다. 연습용은 8만 원, 고급 공연용은 14만 원, 최고급은 24만 원씩 한단다. 생각보다 비싸다.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아리랑’과 ‘버나놀이’는 <오작교 아리랑>의 극 흐름을 이어주는 아주 훌륭한 장치이자 소품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마당극 시작하기 전에 5~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관객을 대상으로 아리랑 부르기 대회를 해보면 어떨까. 아리랑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냥 아리랑을 부르든지 진도아리랑을 부르든지 밀량아리랑을 부르든지 정선아리랑을 부르든지 밀양머슴아리랑을 부르든지. 두세 명 관객이 나와서 한번씩 부르게 하면 어떨까. 반주 준비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고. 선물로 큰들 정기공연 입장권 같은 걸 줘도 되겠고.
그리고 버나놀이는 관객들이 신랑, 신부댁 하객으로 나뉘어 대결을 펼치는 장면에서 일부 관객은 체험해 보게 되지만 어떤 관객들, 특히 꼬마들은 자기도 한번 돌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다. 그래서 극이 끝난 뒤 버나를 돌려보고 싶은 어린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좀 갖고 놀게 하면 어떨까. 이땐 연습용 8만 원짜리 두어 개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버나는 <오작교 아리랑> 맨 끝에 다시 등장한다.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화해하고 남돌이와 꽃분이는 양가 부모와 하객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올린다. 축하 잔치가 열리고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를 때 커다란 버나가 등장한다. 관객들이 하나, 둘, 셋 하고 크게 외치자 양가 어른들이 함께 힘을 모아 버나를 위로 솟구쳐 올려 돌리기 시작한다. 극이 끝날 때가 되었다. 모든 출연자들이 꽹과리를 치고 장구를 치고 상모를 돌리며 흥을 돋운다. 마침내 버나를 멈추고 세우자, 그 버나에는 한반도기가 그려져 있다. 흰색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오르는 모습도 선명하다. 다소 상투적인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친다.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더러 있다, 나처럼. 아랫마을 남돌이와 윗마을 꽃분이가 저렇게 아름답게 맺어졌듯이 우리나라도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비원(悲願) 같은 것이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7월 28일 마당극은 저녁 7시에 시작하였다. 나는 오후 5시에 진주에서 출발했다. 함께 공연 보기로 한 두 분을 진주교대 정문에서 만나 신나게 달렸다. 최소한 한 시간은 먼저 도착하여 멋진 공연을 볼 마음의 준비도 하고 주변 구경도 하고 자리도 제일 좋은 자리로 잡고, 이 정도의 노력은 후원회원이자 고정 관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의보감촌을 지나 산청과 함양의 경계지점에 있는 ‘주암식당’으로 갔다. 이곳 경호강에서 잡은 잡어로 끓인 어탕국수를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순신막걸리 한 병과 어탕국수를 먹으니 공연이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퍼질러 앉아 밤새도록 마시고 놀고 싶은 생각도 났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강 건너 양조장에 가서 ‘팔선주’ 몇 병 산 뒤 다시 공연장으로 향했다. 저녁 공연이어서 그런지 객석을 덮고 있던 천막이 없다. 시원하여 아주 좋다.
큰들 단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한눈에 다 알아본다. 그런데 6시 45분쯤 되었을 때 소나기가 내리는 게 아닌가. 단원들은, 단원이랄 게 있겠나, 배우들이 모조리 달려 나와 조명등 전기시설을 비닐로 씌우고 의자를 젖혀놓느라 바빠진다. 비가 그치면 공연을 시작하겠다는 안내말씀도 방송을 타고 나온다. 관객들은 우산을 꺼내거나 근처 화장실 처마 밑으로 피신했다. 하늘을 보니 그리 많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 있자니 야외에서 하는 마당극이란 날씨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고, 적당한 위치에 실내 상설 공연장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다행히 7시 조금 전에 비는 그쳤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공연전에 공기를 식혀 주고 씻어 주고, 정확하게 공연할 시간에 그쳐 주는지. 천우신조. 왕산의 장난.
남돌이와 꽃분이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오작교 덕분이다. 오골계의 공이 컸다. 아무튼 신랑 친구들이 신부댁에 함도 팔았다. 저 멀리서 이 결혼을 반대하기 위해 두 집안 부모들이 빨간 신호등 파란 신호등 잘 지켜가며, 또는 택시를 타고 달려오고 있건 말건. 초례청이 차려지고 예쁜 신부도 나왔다. 주례가 “신랑, 신부 맞절!”이라고 하는데, 웬걸, 신랑이 없다. 남돌이 역할 신랑은 관객 중에서 한 분을 사전 예고나 통지나 안내 없이 즉석에서 모시는 게 이 마당극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내 옆에 앉은, 나와 일행인 정형상 형이 낙점됐다. 1~2초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형은 벌떡 일어나 초례청 앞으로 나간다. 이번 공연에서 만약 100번 웃었다면 그중 50~60번은 이 형 덕분에 웃었다. 대개 얼떨결에 불려 나간 수많은 남돌이들은 배우들이 하라는 것만 하는데 형상 형은 좀 오버를 한 것이다. 그것을 알고 보는 나는 나대로 우스워 죽겠고, 그런 장면을 처음 보는 관객들은 그래서 또 웃었다. 남돌이 부모가 객석에 숨어 앉은 남돌이에게 “너, 나 몰라?”라고 하고, 그래도 남돌이가 그대로 앉아 있으면 “내가 니 애비다!”라고 소리 지르고 뒤이어 남돌이 어머니가 “나는 니 에미다!”라고 하게 되어 있는데, 이날 남돌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라고 먼저 말해버리는 바람에 남돌이 부모가 대사를 잠시 이어가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장면도 나왔다. 나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세상에 되바라진 남돌이 같으니라고!’ 이런 생각도 했다.
공연 마치고 정형상 형과 나, 그리고 서동하 누님은 진주로 자리를 옮겨 함양에서 사 온 ‘팔선주’를 비우면서 웃었다. 물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웃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남돌이로 화제가 돌아갔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마시고 놀다 보니 한여름 더위도 잊었고 취한 술도 잊었고 오로지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는 건 <오작교 아리랑> 장면 장면들뿐이었다.
7월 14일 토요일에는 삼천포대교 공원에서 <오작교 아리랑>을 보았다. 이날 공연은 8시 넘은 시각에 시작했다. 시원하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유난히 흥이 많고 유쾌한 사천 시민들 틈에서 공연을 즐겼다. 그리고 야간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토요일 오후 4시, 일요일 오전 11시에 하던 공연을 저녁 7시로 옮긴 것인데 아주 좋다. 도심에서 지글지글 끓는 태양에 시달리다가,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공간이동을 하면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 데서 훌륭한 공연을 만끽할 수 있으니 이만한 피서도 없고 이보다 더 좋은 신선놀음도 없지 않나 싶다. 배우들도, 아무리 그래도 덥고 땀나고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좀 나은 환경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좋지 않겠는가 싶다. 아무튼 이번에도 잘 봤다.
이제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열리는 마당극은 여섯 번 남았다. 망설이는 분이라면 이젠 서둘러야 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8월 3일(금) 19:00 효자전(★), 8월 4일(토) 19:00 효자전, 8월 10일(금) 19:00 오작교 아리랑, 8월 11일(토) 19:00 오작교 아리랑(★), 8월 18일(토) 19:00 효자전, 8월 19일(일) 11:00 효자전(★). 별표가 붙은 건 내가 보러 가려고 찜한 날이다.
2018. 7. 29.
시윤
(사진은 대부분 서동하 님이 찍은 겁니다. 사진을 건네주신 서동하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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