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주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은 그 사랑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들에 대한, 그것도 큰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과 지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6월 16일, 17일 이틀 동안 산청군 동의보감촌 잔디마당에서 열린 극단 큰들의 마당극 <효자전>을 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다.
지리산 자락의 약초골 산청에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귀남과 갑동 형제. 큰아들 귀남은 의사가 되려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려는데 노잣돈이 없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시험에 합격하여 보란 듯이 의사가 되면 집안을 크게 일으키리라 믿고 기둥 뿌리를 뽑아 노잣돈을 마련해 준다. 큰아들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운 맹목은 작은아들의 성정을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자식 출세 위해 집안 기둥 뿌리를 뽑아주고
어머니는 기둥 뿌리를 뽑아 내의원 시험 보러 한양 가는 큰아들 귀남의 노잣돈으로 준다. 작은아들 갑동이 반대하자 어머니가 갑동을 '제압'한다.
그렇게 기둥 뿌리를 뽑아 줬는데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집안이 폭삭 망할지도 모른다는 계산 따위는 안중에 없다.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집안이 거덜나더라도 돈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엔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다. 천둥벌거숭이로 어머니의 애를 태우던 둘째아들 갑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큰아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는다. 작은아들의 반대가 심할수록 어머니의 신념은 더욱 굳어지는 듯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속담은 옛말일 뿐인가.
큰아들 귀남은 꼭 합격하여 효도하겠노라 다짐하며 한양길에 오른다. 그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중은 어떠할까.
드디어 내의원 시험에 합격한 큰아들 귀남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편지 봉투를 열 때, 편지를 읽을 때 어찌나 반갑고 고맙고 조마조마한지 어머니는 몸을 부르르 떤다. 한평생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아 마침내 내의원이 된 큰아들의 편지는 어머니를 눈물겹게 만들고 심장이 떨리도록 긴장되게 만든다. 하지만 큰아들의 편지는 ‘돈을 보내라’는 내용뿐이다. ‘어머니 건강히 잘 계신지’ 묻는 한마디도 없다. 괘씸하다고 호통을 칠 만하지만 어머니는 그러하지 않는다. 이 즈음에 어머니는 큰아들의 인간됨을 간파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했고, 실제 그럴 만한 사정은 있었다.
마침내 내의원 시험에 합격한 귀남에게서 편지가 온다. 어머니는 '귀남'이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떨린다. 애틋하고 안타깝다.
자식은 어머니를 촌스럽다고 부끄럽게 여기고
어머니는 어찌어찌 돈을 마련하여 상경한다. 큰아들은 더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대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타고난 바탕이 ‘흙수저’인지라 승진은 어렵기만 하다. 둘째아들 갑동과 함께 한양 귀남에게 찾아간 어머니는 애써 마련한 돈과 곶감을 건넨다. ‘네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어떡하든 구해줄게’ 하는 심정이 가득하다. 그런 어머니와 동생을 대감 앞에서는 부끄럽게 여겨 ‘모르는 사람’이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큰아들의 불효막심한 언사도 용서한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애당초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잘못조차 잘못으로 보이지 않는 맹목의 어머니에게 꾸지람이나 지청구나 질책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식을 어떤 길로 끌고 갈지에 대한 판단도 불가능했다.
귀남은 돈을 마련하여 한양까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을 촌스럽다며 모른 척한다. 애써 갖고 간 곶감을 팽개친다. 그러나 어머니는...
세자가 큰 병에 걸리자 내의원에 비상이 걸린다. 귀남은 산청 지리산에 귀한 약초들이 많이 있으니 산삼을 구해 오겠다고 큰소리친다. 그사이 어머니의 병은 더욱 깊어지고 기어이 쓰러지고 만다. 작은아들 등에 업힌 어머니는 이제부터 잘 모시겠다는 작은아들의 말에 반신반의한다. 병을 꼭 낫게 해 주겠다는 말에 조금의 신뢰도 보내지 않는다. 그런 아들이지만 갑동의 등에 업힐 때 어머니의 표정은 잠시 행복감에 젖어든다. 아무리 큰아들이 최고이지만, 작은아들도 자식이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갑동은 지리산으로 산삼을 구하러 떠난다. 갑동은 천신만고 끝에 산신령의 가호를 입어 어렵사리 산삼을 구해온다. 그때 산삼을 구하기 위해 한양에서 귀향한 귀남이 등장한다.
산청으로 돌아온 뒤 어머니 병환은 깊어지고, 지리산 산신령은 갑동의 효성과 인간됨에 감동하여 산삼을 허락한다.
자신의 병을 고칠 산삼마저 큰아들에게 쥐어주고
귀남은 어머니 병구완에 쓰여야 할 산삼을, 세자에게 갖다바침으로써 자신의 출세를 보장받기 위해 혈안이 된다. 당연히 갑동은 절대 반대한다. 산삼을 사이에 두고 형제가 줄다리기를 한다. 누가 봐도 그 산삼은 어머니의 병을 고치는 데 쓰여야 한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병보다 큰아들의 출세가 더 중요하다. 갑동에게서 산삼을 뺏어 귀남에게 쥐어준다. 도대체 어머니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마저 지푸라기 버리듯 내던질 수 있는 어머니. 손발이 터지고 허리가 부러져도 오로지 자식만 잘된다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는 어머니. 그깟 산삼이 대수랴.
어머니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데 써야 할 귀하디 귀한 산삼마저 큰아들 귀남의 출세를 위한 일에 쓰고 만다.
결국 어머니는 죽는다.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어머니는 삼도천을 건너기 직전까지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자식들 앞날만 걱정한다. ‘부디 잘 살아야 한다’고 되뇌는 어머니의 심중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자식이더란 말인가. 이승에 남은 미련이란 오로지 자식이 잘되는 것뿐인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아름다웠던 청춘 시절과 즐겁고 재미있던 추억 한 도막조차 없었을까. 보고 싶은 친구도 있을 것이고 가고 싶은 곳도 있을 것이고 먹고 싶은 것도 있었을 텐데,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자식뿐이었다. 그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못 챙겨주고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지 못한 게 한(恨)이 된 어머니.
저승길 가면서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자식들 걱정만
저승길을 가면서도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어머니의 마음. 자식들은 그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까.
내의원에서 실각한 큰아들이 비참한 몰골로 돌아온 날은 어머니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이다. 어머니는 ‘니 얼굴이 와 그렇노?’라고 자식 걱정부터 한다. 죽어 저승을 가면서조차 말이다. 당연히 작은아들은 형에게 대들 수밖에. 그 귀한 산삼을 가져가지 않았던들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니. 형제간 다툼은 극에 달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머니는 천둥 같은 고함으로 자식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 떠돌던 어머니의 혼령이 자식들의 꿈에 나타난 것일까.
자식들이 다툼을 벌이자 천둥 같은 꾸짖음으로 훈계하는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에겐 오로지 자식 잘되는 것 말고는 미련도 후회도 없는 것일까.
자신이 죽고 없더라도 형제간에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것 이외에는 달리 바랄 것도 없고 이승에 대한 미련도 없다. 그런 어머니의 눈에 형제간의 다툼은 누구의 잘못을 따질 것도 없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에는 아들들이 건강하게, 복 받으며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나지만, <효자전>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번쯤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어머니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어머니는 자식에게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줘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 과거길 노잣돈으로 쥐어주고, 한양까지 돈뭉치를 들고 가서도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병을 고쳐줄 산삼도 자식 출세를 위한 일에 바쳐주고, 마침내 죽어 저승으로 가면서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어머니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마당극이 펼쳐지는 한 시간 동안 스스로 끊임없이 물어보고 물어보았으나 답을 알지 못하였다. 나 또한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있고 나 또한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고 싶을 것임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가 없는 사랑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여, 토요일 공연을 보고 일요일 다시 보러 간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보아도 답을 알아내지는 못할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큰아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 그런 한편으로 작은아들들과 딸들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이해하기 힘든 무관심과 냉대. 하지만 어머니의 깊은 마음속엔 작은아들들과 딸들에 대한 넉넉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어머니다. 시원한 열무김치 담가 놨으니 가져가라는 당부다. 그러잖아도 오후에 찾아뵐 요량이었다. <효자전>의 감동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본가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부추전 재료를 만들고 계신다. 부추와 매운고추, 양파, 방화 따위를 넣고 소금간을 한 뒤 밀가루를 적당히 부어 섞는다. 냉동실을 뒤져 마른새우 갈아 놓은 걸 조금 넣는다. “이렇게 하면 맛있다.”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 있어도 피곤하고 귀찮을 텐데,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부추전 재료는 큰형, 나, 동생 몫을 나눠 통에 담는다. 수돗가에는 생김치 담가 창원 작은형에게 보내주려고 배추를 절여 놓았다. 창원으로 택배를 부치게 작은형 주소를 적어 놓으란다. 냉장고를 열어 물김치를 꺼내 세 통에 담는다. 냉동실을 뒤적거리더니 얼려 놓은 콩 한 봉지를 주신다. “밥에 넣어 먹으니 맛있더라.”고 한다. 무 하나를 천 원 주고 샀는데 새콤달콤 무쳐 먹으면 좋다면서 한 도막 넣어 주신다. 다시 냉장고를 열더니 멸치 맛국 한 병을 꺼내 주신다. 찌개 끓일 때나 국수 삶아 먹을 때나 아무 때나 있으면 요긴하단다. 냉장고 아래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살구, 자두를 꺼낸다. 하나 먹어보란다.
돌아오는 길, 양손이 묵직하다. 월급 받았다고 용돈 몇 푼 건네고 그것으로 자식 도리를 다한 듯 여기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어디 아픈 데 없는지 여쭤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는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다. 어머니는 일주일 내도록 무엇을 장만하여 보내줄까, 입맛 없는 여름철엔 무엇을 해주면 기력을 보충할까를 생각하고 계셨는데…. 그 마음과 그 생각의 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다. 어머니는 그렇다.
2018.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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