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우리 시대 ‘효’에 대하여-큰들 마당극 <효자전>을 보고

by 이우기, yiwoogi 2018. 5. 19.

()라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이다. 그 무게로 치자면 지리산만큼 될는지 왕산만큼 될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깊이나 높이로 치자면, 아서라 말아라, 절대 잴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 아닌가. 두 말 하면 잔소리고 세 말 하면 숨가쁘다. 공자는 말했다. ‘효도는 백행의 근본이다라고 말이다. 사람이 행하여야 할 일 백 가지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효도라는 말이다. 또 누군가는 말했다. ‘군주가 어긋나면 세 번 충언하되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군주를 버리라. 그러나 어버이가 도둑질을 나갈 때 세 번 간하되 그래도 되돌아오지 않으면 울면서 따라가라.’ 어버이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효도를 입에 올리기 민망한 시절이다. 늙은 부모를 모시고 캐나다 어느 관광지에 가서 몰래 버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현대판 고려장이다(고려장이 원래는 없었는데 지어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도 일어난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형제간 아귀다툼으로 부모 속을 썩이는 일은 얌전한 일에 속한다. 그렇다고 현대, 삼성 같은 재벌들의 이른바 왕자의 난을 감싸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효도가 무엇인지, 왜 효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고민하지 않고도 잘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백행의 근본이라는 말은 저 멀리 바닷속으로 던져버린 지 오래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 ‘과 함께 권력을 유지해 나가려는 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라는 설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극단 큰들이 산청군 동의보감촌에서 9년째 공연하고 있는 마당극 작품 가운데 하나가 <효자전>이다. 효도가 망도 취급 당하고 효자들의 씨가 마른 세상에 어쩌자고 <효자전>인가. 이 작품은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산청한방약초축제에서 상설 공연을 한 작품이다. 2013년에는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에서 상설 공연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의 신나는 예술여행 작품으로 뽑혔고, 2018년 올해는 우수예술단체 찾아가는 문화활동 작품으로 선정됐다. 그러니까 효도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민망한 시절인데도 큰들이 빚어내는 <효자전>은, 마당극 공연장에서 얼쑤라는 추임새를 제법 질러본 관객들에게나, 피보다 더 귀하게 나랏돈을 쥐어주는 정부 기관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대를 가질 수밖에.

 

 


그렇게 한번 가보자, 가보자했는데도 그렇게 인연이 닿지 않더니 드디어 십년 묵은 체증 내려가듯 모든 게 뻥 뚫렸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목욕재계도 했다. 다솔사부터 다녀와야 하던 날이다. 돌아오는 길에 사천시 곤명면 작팔리에 있는 큰들 사무실 겸 연습실 겸 숙소 겸 놀이터에 들렀다. 건담을 보기 위해서다. 박춘우 화백이 어느 긴 휴일을 온통 바쳐서 세웠다는 건담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자 마음먹은 지 벌써 며칠째이던가. 아무튼 건담은 건담이었다. 19744월 일본에서 첫선을 보인 로봇 캐릭터라고 하니 아내와 나이가 같다. 아내와 함께 건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산청으로 향했다. 건담이 지키는 게 큰들이기도 하고 사천이기도 하고 우리 지구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효도라는 가치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지리산 약초골 산청에서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두 아들의 지극정성 효도 이야기가 <효자전>의 뼈대다. 큰아들 귀남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한양으로 내의원 시험 치러 간다. ‘허준이야기와 비슷하다. 천둥벌거숭이 둘째 갑동이는 늘 말썽을 피우며 어머니 애를 태운다. 큰아들은 효자이고 둘째아들은 불효자이다. 큰아들은 내의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고향으로 내려오지도 않고 돈을 부치라고 한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지위 높은 대감에게 달라붙어 있다. 기생집을 따라다니며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그사이 어머니는 병이 깊어진다. 둘째아들은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지리산으로 산삼을 찾아 떠난다. 큰아들은 불효를 저지르고 있고 둘째아들은 효자가 되었다.

 

 


무엇이 효도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한 시간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들 셋을 낳았다. 가장 잘난 큰아들은 나라의 아들이다. 공부를 많이 하여 나라의 부름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다음 잘난 둘째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다. 어쩌다 보니 처가살이를 한다는 이야기다. 드라마의 소재로 곧잘 나오는 이야기인데,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그 처가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못난 막내아들이 부모 곁에서 농사 지으며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고 갑작스런 병환을 돌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들 셋 가운데 누가 가장 효자인가.

 

부모에게는 바로 곁에 붙어 앉아서 생선 뼈 발라줄 자녀도 필요하다. 아프다고 누워 있으면 당장 업고 병원으로 달려갈 자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효자전>의 갑동이처럼. 부모는 그런 자녀를 바라보며 고맙고 대견하여 눈물 흘릴 것이다. 저 자식이 지난 생에서는 나의 부모였던가 할 것이다. 그것뿐인가. 자식이 나라의 부름을 받아 큰일을 해내면 부모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 사람이 우리 동네 누구 자식이라며?”라는 말이 근방으로 퍼져 나가고 어쩌다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효자전>의 귀남이가 그렇게 노력하여 내의원이 된 것이 꼭 자기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안다. 시골 마을 어귀에 누구집 몇째 아들 어느 시 사무관 승진이라는 현수막을 보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그런 자식들 중 한둘은 처가의 도움을 받았음 직하다. 어느 자식을 더 효자라고 할 것인가.

 

 


이런 주제는 커다란 강의실에 몇백 명 모아놓고 몇 시간 동안 토론을 해도 결론 내기 어렵다. “둘 다 효자다라고 쉽게 매조지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결코 그렇게 쉬울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첫 의도에 따라 다르다. 뜻하지 않게 일이 매듭지어지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인간만사가 다 그런 것이다.

 

중차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다루는 큰들의 <효자전>을 보는 한 시간은, 그러나 지리산만큼 무겁지도 않고 그렇게 깊지도, 높지도 않다.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관객의 호흡에 정신을 맡겨놓고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뜻하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가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분위기를 돋워 주는 음악도 최신 댄스곡에서부터 가야금해금 연주까지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을 들었다 놨다 한다. 배우들은 몇몇 주인공을 제외하면 모두 일인다역이다. 한 사람이 갑동이 친구도 되었다가 산신령도 되었다가 저승사자도 된다.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갑질 이야기가 느닷없이 이야기속에 등장한다. 마당극이 원래 그런 것이다. 사회 비판적 요소가 쉽게 끼어든다는 말이다. 아주 진지해야만 할 백행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가 농담과 노래와 춤으로 버무려진다. 웃다가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입이 찢어져라 웃게 된다. 틈틈이 끼어드는 깨알같은 산청군의 자랑도 놓치기 어렵다.

 

 


9년가량 계속해온 공연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 배우들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관객들의,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관객들과 하늘과 지리산의 호흡은 찰떡이다. 모두들 백 년 묵은 산삼 뿌리를 한 가마솥에 고아 나눠 먹은 이들 같다. 무대 한쪽 구석에서 악기를 두드리는 악사들은 마당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가장 진지하고 엄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잠시 살펴보는 것도 큰 재미다.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방그레 웃다가 입술을 삐죽이다가, 이때다 할 때 쨍, , 둥둥, 두다닥탁 악기들을 울려댄다. 다루는 악기는 한둘이 아니다. 북도 있고 태평소도 있고 꽹과리도 있고 심지어 현대악기라 할 심벌즈, 기타도 있다. 그러다가 짐짓 모른 척하고 무대 뒤로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진 악사는 잠시 후 반대쪽에서 전혀 낯선 인물로 등장한다.

 

오후 2시에 공연을 시작할 터인데, 130분까지는 마당 주변이 조용하다. 분위기를 돋우려고 켜 놓은 음악만 잔잔하게 깔린다. 오늘 따라 먹구름이 끼어 분위기도 스산하다. 140분쯤 되니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분장을 마친 배우들도 화장실을 다녀온다. 무대감독을 맡은 이는 관객들 자리가 모자랄까 봐 미리미리 돗자리를 깐다. 애초 가지런히 줄지어 세워 놓은 걸상들도 뒤로 몇 걸음 물린다. 관객들이 점점 모여드는 때문이다. 마당을 에워싸기에 충분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른부터 젖먹이 꼬마까지 빼곡하다. 가까이에서 마실오듯 온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목에 명찰을 건 단체 관광객도 많이 눈에 띈다. <효자전>만을 겨냥하고 달려오지는 않았겠지만, 기꺼이 한 시간을 투자할 만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한 시간 동안 실컷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극을 시작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았을 시점부터 웃음보가 터진 것 같다. 많이 울기도 했다. 학창 시절 막걸리상 앞에 두고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던 <비 내리는 고모령>이 그렇게 구슬픈 가락일 줄 뉘라서 알았을까. 큰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보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어머니들과 그 아들들을 생각했다. 그 아들들의 허랑방탕한 생활과 또 그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어머니들, 애끊는 심장을 부여잡고 밤새 뒤척일 우리들의 어버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의 성공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해 마침내 쓰러지고 마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눈물이 흘렀다. 내 옆에 앉은 아내, 내 앞에 앉은 낯 모르는 어느 아저씨, 그 옆에 앉은 검은 모자 쓴 흰머리 아저씨들도 가끔씩 눈시울을 훔쳤다. 그러다 보니 한 시간이 가버렸다. 기왕 하려면 두 시간쯤 하잖고.

 

 


문학, 그중 소설을 하는 사람이 쓰는 용어 중에 복선이라는 게 있다. <효자전>에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이라고 할 만큼 딱 부러지게 깔아놓은 복선이 있다. 처음 우체부가 등장하여 무심하게 들먹이는 사람의 이름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사람 이름 갖고 장난을 제법 진지하게 치는데, 처음엔 저게 왜 저러나싶을 것이다. 하지만 맨끝까지 공연을 보고 나면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반전의 준비를 마당극 맨 처음 첫 대사에 능청스럽게 깔아놓은 것이다. 그걸 눈치챌 만큼 약삭빠른 관객은 아마 1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아닐까. 그런 건 건담에게 물어봐도 절대 안 가르쳐 줄 것이다. 또다른 복선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나도 못 알려준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러갈 핑계이자 복선이다.

 

효도에 대하여 생각하며 진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옥봉동 본가에 간다. 마늘쫑 하고 멸치 섞어 볶아 놨고 열무 김치 담가 놨으니 가져가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엊그제 월급날이었는지라 농협 들러 용돈부터 찾았다. 어머니 얼굴을 살펴본다. 온몸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그래도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 보인다. 어제 이모집에 가서 마늘쫑 뽑느라 힘들었다는 말씀밖엔 없다. 옥상에 마늘을 뽑고 고추 모종을 심어야 한다고 하셔서 좀 거들어 드렸다. 뭐든 좀 사 먹으러 나가자고 하니 한사코 오늘은 싫고 귀찮다고 하셔서 그냥 돌아왔다. 일주일에 한 번, 어쩌다 보면 한 주 걸러 한 번씩 뵙는 얼굴에서 큰 차이가 없으시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긴다. 나는 효자 축에는 못 낀다. 거대한 이데올로기인 의 부속품이 되긴 애당초 글러먹은 것이다.

 

 

2018.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