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길에서 우리 집까지 오려면, 아파트 입구에서 집까지 청룡열차를 타는 듯한 오르막이 두 번이나 있는데 반대로 내려가자면 급경사 내리막이다. 처음 우리 동네에 오는 사람은 “이런 곳이 있구나!”라는 말을 반드시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파트 담벼락 바로 너머에는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과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이 우람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그 법원과 검찰청 앞쪽으로는 이른바 신안평거 아파트 단지가 펼쳐져 있다. 법원 검찰청 바로 코앞에는 우후죽순 새로 생겨나는 변호사 사무실과 식당들이 점령하고 있다. 우리 아파트는 그 법원 바로 뒤에 붙어 있다. 앞과 뒤는 이렇게 다르다. 아무튼 우리 아파트는 오르막 내리막이 어지간히 위태로운 곳이다.
진주에는 눈이 자주 오지 않는다. 그래서 진주에 사는 운전자들은 눈이라도 오면 혼비백산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일이 몇 해에 한 번은 일어난다. 우리 아파트에서는 더욱 그렇다. 몇 해 전 이맘때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바깥이 새하얀 세상으로 변해 있다. 소복하게 내린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은 잠시, ‘아차, 출근은 어떻게 하지’ 하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때렸다. 얼른 빗자루를 들고 내려갔다. 아랫집 아저씨는 벌써 나와서 비질을 하고 있었다. 대충 길을 뚫어놓고 돌아와 밥을 먹고 출근을 서둘렀다. 그때까지 눈은 내리고 있었고 아랫집 아저씨는 눈을 치우고 있었다. “오늘은 안 되겠는걸. 차를 두고 가는 게 나아.”라는 말을 듣고 나는 걸어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눈이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내린 날이었다. 비도 좀 왔던가 보다. 눈이 왔다고도 할 수 없고 오지 않았다고도 하기 애매한 그런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차를 운전하려고 하니, 역시 아랫집 아저씨가 “오늘은 차를 두고 가는 게 좋겠다.”라며 아래쪽을 가리켰다. 탑차 한 대가 미끄러져 내려가 아래쪽에 세워 둔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공교롭게도 그 승용차 운전자는 그 순간에 조수석 옆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그만 밀어닥친 차와 벽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구급차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택시를 탔다.
희망교 건너 내동 오거리를 지나 경상대 방향으로 가는데, 중간중간 길가에 처박힌 차들이 보였다. 어떤 차는 빙그르르 반대로 돌아 처박혔고 어떤 차는 가는 방향에서 그대로 배수로로 빠지기도 했다. 급한 출근길을 서두르다가 졸지에 사고를 당한 차들을 보며, 차를 갖고 나서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날 진주-통영 고속도로는 난리가 났다. 맨눈으로 보면 눈이 내리지 않은 것 같은데 도로가 얼어 있었던 것이다. 눈이 아주 조금 내리는가 싶다가 뒤이어 비가 내렸고, 그 빗물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것이었다. 가뜩이나 얼어붙은 길에서 운전이 서툰 사람들이 크고 작은 사고를 내기도 하고 당하기도 한 것이다.
올해도 벌써부터 신문과 방송에서 겨울철 도로 결빙을 경고하는 기사를 내고 있다. 이미 온나라 곳곳에서 사고가 나고 있다. 11월 24일에는 경기도 안산에서 차량 27대가 추돌하는 사고가 났나 보다. 이 소식을 전하는 케이비에스 뉴스 보도는 이렇다. “어젯(23일)밤부터 갑자기 추위가 몰아 닥치면서 도로 표면이 얼어 붙어 곳곳에서 교통 사고가 이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도로 결빙, 이른바 '블랙 아이스'가 사고를 유발하는데요. 특히 눈까지 내린 오늘(24일) 경기도 안산에서는 차량 27대가 추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안타까운 일은 하나 더 있다. ‘블랙 아이스’(black ice)라는 말 때문에 ‘노면살얼음, 살얼음’ 이런 말을 잊어버리는 일이 그것이다. ‘이른바’ 블랙 아이스는 ‘겨울철 도로 위에 녹은 눈이 얼어붙어 얇은 얼음층을 만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 겨울철 도로 숨은 복병 ‘블랙아이스’ 주의보 (강원도민일보)
∙ 보이지 않는 위험 ‘블랙 아이스’를 조심하라 (교통방송)
∙ 겨울철 도로 불청객 ‘블랙아이스’ (디지털타임스)
∙ 도로 위 복병 ‘블랙아이스’의 계절이 왔다… “출근길 특히 조심” (국민일보)
∙ 핸들이 제멋대로…눈길보다 위험한 ‘블랙아이스’ 주의보 (제이티비시)
∙ 무서운 ‘블랙아이스’…새벽 빙판길 차량 27대 추돌 (케이비에스)
‘black ice’에서 ‘black’은 검다는 뜻이요, ‘ice’는 얼음이라는 말이니, 블랙 아이스는 ‘검은 얼음’이다. 얼음이 검다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아스팔트 도로에 얇게 얼음이 얼었는데, 얼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얇아서 아스팔트 검은 빛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는 뜻이다. 운전자들은 도로가 얼어붙은지도 모르고 평소대로 운전하다가 낭패를 당하게 된다. 앞차가 사고를 내면 뒤차가 급정거하여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다. 죽 미끄러져 앞차를 들이받게 되고 또 뒤따르는 다른 차도 똑같은 위기에 몰린다. 무려 27대가 잇따라 들이받았다고 하잖은가.
블랙 아이스를 ‘노면살얼음’ 또는 그냥 ‘살얼음’이라고 하면 좋겠다. 국립국어원에서 내세운 순화어이다. ‘살얼음’은 도로가 얼어붙은 상황뿐만 아니라 시냇물이 살짝 언 것도 가리키는 듯하다. ‘노면 살얼음’이 가장 알맞겠는데 좀 길게 느낄 수도 있다. ‘검은 얼음’이라는 말은 영어를 그대로 뒤친 것이긴 하지만 겨울철 ‘노면결빙’을 가리키는 말로 씀 직하다. 언론도 ‘블랙 아이스’를 많이들 쓰지만 때때로 ‘살얼음’, ‘노면 살얼음’, ‘도로 살얼음’으로 고쳐 쓰는 곳도 많다. ‘살얼음’과 ‘블랙 아이스’를 한 제목에서 섞어 쓴 곳도 있다.
∙ 일산대교서 14중 추돌사고…도로 위 ‘살얼음’ 주의보 (제이티비시)
∙ 안개 낀 살얼음 빙판 블랙아이스…일산대교 14중 추돌 13명 부상 (연합뉴스)
∙ 아스팔트에 살얼음 ‘블랙아이스’로 출근길 교통사고 잇따라 (조선일보)
∙ 일산대교 살얼음에 미끄러져 쾅쾅쾅쾅! (동아일보)
∙ 일산대교 14중 추돌사고로 13명 부상…얇은 살얼음 ‘블랙아이스’ 원인인 듯 (케이비에스)
‘블랙 아이스’라고 쓰는 언론도 ‘살얼음’이라는 말을 쓴다.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쓴다. 좋다. 한 기사의 제목에서 두 말을 섞어 쓰기도 한다. 좀 웃긴다. 그래도 좋다. 언론들도 ‘블랙 아이스’라고만 하면 국민들이 잘 못 알아볼 것으로 지레짐작한 것일까. 반대로 ‘살얼음’이라고만 하면 도로 위의 얇은 얼음막을 가리키는 말로는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블랙 아이스가 살얼음을 완전히 잡아먹지는 못한 듯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올 겨울 다 가기 전에 이 살얼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운전자들이 혼비백산할지, 얼마나 많은 차들이 부서지고 사람이 다칠지 걱정이다. ‘블랙 아이스’라는 말 때문에 ‘살얼음’, ‘노면 살얼음’, ‘도로 살얼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설움을 당할지도 걱정이다. ‘검은 얼음’이라는 말은 과연 생명을 얻을수 있을지 지켜본다.
2017. 12. 2.
*사진은 서울시 교통정보과에서 찍은 것을 언론에서 보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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