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는 8월 31일자 신문에서 “서울고법이 30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파기환송심에서 항소심 때의 징역 3년보다 늘어난 징역 4년 실형을 선고하는 과정에서 세계일보가 보도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장악’ 보고서가 스모킹 건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보도했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사건을 재판하여 원래 받은 형량보다 더 큰 벌을 준 것이다. 그것 참 꼬시다. 언론보도가 사건을 해결했다고 할까 재판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까 아무튼 큰 역할을 한 것도 눈에 띈다. 이러라고 언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나는 여기서 ‘스모킹 건’이라는 말을 째려보고 있다.
‘세기의 재판’이라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서도 ‘스모킹 건’이라는 말이 나왔다. <뉴시스>는 8월 28일 보도에서 “당초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으로 알려졌던 안종범(58)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이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유죄 판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주목된다.”라고 썼다.
세간에서는 안종범 수석의 수첩을, 조선왕조실록에 빗대어 ‘종범실록’으로 불렀다. 그 수첩이 이재용의 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이다. ‘스모킹 건’이라는 말 뒤에 ‘결정적 증거’라고 적어 놓았다. ‘스모킹 건’이라고만 하면 독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향신문>은 같은 사건을 다룬 기사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58)의 업무 수첩과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64)의 휴대전화도 ‘스모킹 건’(핵심 증거)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경향신문은 스모킹 건을 ‘핵심 증거’라고 풀어 놓았다. 역시 ‘스모킹 건’이라는 말만으로는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스모킹 건(smoking gun)이라는 말은, 1800년대 말 유명한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단편소설 <글로리아 스콧 호>(The Adventure of the Gloria Scott)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코난 도일은 총을 쏜 범인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연기가 나는 권총(Smoking Pisto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권총(Pistol)이 총(Gun)으로 바뀌어 ‘스모킹 건’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하였다(다음백과)고 한다.
‘스모킹 건’(smoking gun)이란 직역하면 ‘연기 나는 총’이란 뜻으로 범죄 또는 특정 행위나 현상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탄환이 발사된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포착하는 순간,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살해범으로 확실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행위나 현상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의미하는 말이다. 요즘은 의미가 확장되어 특정 현상이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문학적 표현이 사회 현상이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과학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도 쓰인다. 말 한마디가 여러 곳에 두루 쓰이면서 복잡하고 길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명쾌하고 깔끔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참 좋은 일이다.
국립국어원은 7월 24일 ‘스모킹 건’을 다듬은 말로 ‘결정적 증거’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언론들은 이를 깡그리 무시하거나 적어도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무시한 건 그렇다 치고, 묶음표 안에 풀어 쓰면서도 국립국어원 발표대로 ‘결정적 증거’라고 쓴 데도 있고, 비슷하지만 느낌이 좀 다른 ‘핵심 증거’라고 쓴 데도 있다. 국립국어원 발표를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기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뜻이겠다. 다 좋다.
스모킹 건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잘 알아들을까. 전체 문장이나 내용을 보면 대부분 알아볼 것이다. 위에 보기로 가져온 세계일보, 뉴시스, 경향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스모킹 건이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까지는 잘 모르더라도, 아니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시 물어보고 싶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스모킹 건’이라는 말을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들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스모킹’이라는 말과 ‘건’이라는 말은 알겠지만 이 두 낱말이 모여 새로 탄생한 ‘스모킹 건’은 쉬운 말이 아니다. 설명을 듣고 나면 ‘아,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그 증거는 신문 기사에 들어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뭣하러 묶음표를 해서 ‘결정적 증거’니, ‘핵심 증거’니 하는 토를 달겠는가.
그래도 희망을 조금 가져 본다. 가수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이냐 타살이냐 논란이 있었다. 이상호 감독은 이를 실록영화로 만들었는데 제목이 <김광석>이다. 이상호는 김광석이 자살할 특별한 까닭이 없었다는 점, 그의 아내가 결혼 전 이혼한 사실이 있다는 점, 그것을 김광석과 가족들에게 속였다는 점 등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김광석이 사망한 게 1996년 1월 6일이니 20년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된 그의 취재가 관심을 끈다. 이 내용을 다룬 <중앙일보> 9월 1일자 제목은 “‘김광석’, 결정적 증거가 없다”이다. 영화 <김광석>에서 김광석의 죽음을 타살로 볼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스모킹 건’이라고 하지 않았다. 희망의 싹이라고 보기엔 좀 민망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들머리 사이트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스모킹 건’과 ‘결정적 증거’로 검색해 보면 비슷하게 나온다. 어쩌면 두 가지 말이 다투고 있는 듯하다. 국립국어원이 좀 더 신경을 쓰거나 언론계 종사자들이 좀 더 깨우친다면 ‘결정적 증거’가 이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스모킹 건’이 이길지도 모른다. 나는 ‘결정적 증거’를 편들고 싶다.
2017.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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