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과 사촌형은 죽을 둥 살 둥 삽질을 했다. 40kg짜리 시멘트 20포를 비빈다는 게 그리 어려울 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작은 양동이 두 개를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물을 퍼 날랐다.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에서 작업 현장까지는 30m쯤 되었을까. 300m는 더 되는 것 같았다. 시멘트에 모래가 기본으로 섞여 나왔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까. ‘노가다’(막일)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세 사촌형제가 토요일 오후 내도록 비지땀을 흘린 까닭은 무엇일까.
미천면 안간마을 금산골에 할아버지, 할머니 유택이 있다. 할머니는 1992년 겨울 돌아가셨는데 여든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12살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두 분은 수십 년 만에 저승에서 상봉하셨으리라. 산소는 마을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앉았다. 다랑논이던 주위에는 단감나무와 매실나무가 펼쳐졌다. 두 분의 대화가 도란도란 들려오는 듯하다.
한데 아무일 없으리라 여기던 산소에 뒷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침범하고 덩달아 잡풀이 수북하게 돋아나고 급기야 멧돼지들이 제 놀이터로 삼아 설쳐대니, 오랜 궁리와 의논 끝에 무덤 뒤쪽 물길을 바로 잡기로 한 것이다. 반 년 넘게 고민을 더한 끝에 날짜를 잡았으니 그날이 바로 2016년 5월 7일이다. 나흘 연휴의 셋째 날이다.
다른 형제들은 제가끔 바쁜 날이었으므로, 그나마 덜 바쁜 큰형과 사촌형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덜 바빴다기보다는 각각 장남으로서 의무감이 더 컸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미리 포클레인 기사를 수소문하고 물길에 매립할 파이프를 구입하고 시멘트를 사다 놓고 하는 등의 준비는 사촌형 몫이었다. 큰집이었으므로. 모른 척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여 꾸지람 들을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가보기로 한다. 힘도 쓸 줄 모르고 일머리 없는 나이기로서니 왔다 갔다 하면서 잔심부름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여긴 것이다.
오전에는 그야말로 포클레인의 독무대였다. 종횡무진 무엇이든 척척 쿵쾅 처리해내는 포클레인을 보면서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하지 말라”던 우스갯소리를 실감했다. 만약, 그럴 리 없지만, 우리가 삽을 들고 이런 일을 해내자고 덤볐다면 보름이나 한달은 족히 걸렸을 일을, 일 같잖게 처리해 버렸다. 포클레인은 오후 3시 좀 넘은 시각, 일당만큼의 일을 해치우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 보무도 당당한 모습이라니.
우리들의 노동은 그때 시작되었다. 지름 40cm, 길이 8m쯤 되는 파이프를 파묻었는데 물이 들어가는 입구와 흘러나올 출구 쪽을 시멘트로 덧칠하여 잔흙들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고, 그 외 포클레인이 스쳐 지나간 몇 군데를 때워두는 작업이었다. 처음 시멘트를 어떻게 비벼야 하는지, 물과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우리는 요령을 몰라 어색하기만 한 동작을 몇 번이나 한 뒤에 조금 물리를 깨치게 되었다.
갈증을 이기기 위하여 물과 맥주를 번갈아 들이켰고 아픈 허리를 붙들고 잠시 섰는 동안에도 눈길은 해놓은 일과 해내야 할 일들을 훑어대고 있었다. 다섯 시를 넘어갈 땐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삽이고 물통이고 뭐고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쳤다. 너무나 맛있게 배부르게 잘 먹은 점심은 언제 어디로 새어 버린 것이었을까. 세 형제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한나절 노동의 즐거움을 비로소 느낀 것이었을까.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다시 삽을 주워 들고 시멘트를 비비고 퍼나르고를 멈추지 않았다. 일은 여섯 시 전에 끝났다.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젊었을 적 날마다 이런 노동을 통하여 우리들의 학비와 쌀값을 벌었을 터이다. 땀 날 땐 목에 두른 수건으로 훔쳐가며 배고플 땐 막걸리 마셔가며 그렇게 하루의 노동을 바친 뒤 받은 돈은 얼마였을까.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비비고 그것을 짐통에 가득 담아 2층이든 3층이든 지고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을까. 벽돌과 블록은 얼마나 만들고 옮기고 쌓았을까. 그렇게 지어진 집들은 아직 안녕하실까. 아버지는 노동도 없고 땀 흘리지 않아도 되는 천국으로 가셨는데, 아버지 흘린 땀방울들은 모두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되었을까. 가족을 위한 가없는 희생과 봉사로 평생 피땀 흘린 아버지의 노동을 직면하고서 잠시 울컥하였다.
큰형과 사촌형은 두 집을 대표하여 스스로 몸을 일으켜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루를 온전히 바쳤다. 할아버지, 할머니 잠자리가 보송보송 편안하도록, 그 아래 잠든 사촌동생의 잠자리도 덩달아 편안해지도록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들의 노동은 숭고하였다. 나는 그들이 흘린 땀방울 한 닢만큼도 일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노동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했다 할 것이다. 포클레인 굉음 속에서 바닥에 엎드려 꽃들을 찍느라 잠시 넋을 놓긴 했어도 하루의 역사(役事)에 동참했다 할 것이다. 벌레에 물린 손등이 아직 가렵고, 봄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지만, 자손으로서 무엇인가 하였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다. 오늘은 아예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6시쯤 일어나 이러고 앉았다. 그런 날이 있다.
2016.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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