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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만신창이 된 ‘시무룩하다’

by 이우기, yiwoogi 2016. 3. 30.

시무룩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나 그 표정, 태도가) 마음에 못마땅하여 말이 없고 언짢은 기색이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쓰고 싶지 않은 말이고 남에게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기운이 빠지게 하는 말이다. 웃음이 사라지게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필요할 때 쓸 수밖에 없는,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말이다. 세게 말할 때는 씨무룩하다고 하고 작게 말할 때는 새무룩하다고 한다. 시무룩하다가 왜 만신창이가 되었는가. ‘만신창이온몸이 제대로 성한 데가 없을 만큼 여러 군데를 다친 상태어떤 충격이나 실패 따위로 마음이 심히 상하여 모든 의욕을 잃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요즘 즐겨 보는 ‘12’, ‘백종원의 3대 천왕’, ‘맛있는 녀석들시무룩하다가 자주 나온다. 이런 방송을 즐겨 보는 것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의 찌꺼기나 머릿속의 먼지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특히 요즘은 음식 프로그램을 많이 본다.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간혹 집에서 이런저런 요리를 하기도 하는데 방송에서 본 것이 도움될 때가 많다. 그런데 즐겁고 유익해야 할 방송을 보다가 짜증나고 화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왜 그런가.

 

방송을 보다 보면, 한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에게 면박을 주는 일이 생긴다. 어떤 때는 스스로 낭패스러운 일을 당하여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한다. 이때 방송자막에 나오는 글자가 시무룩이다. 마음에 못마땅하거나 언짢은 기색이 있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시무룩하다라고 쓰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돼무룩’, ‘백무룩’, ‘데무룩이렇게들 쓴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맛있는 녀석들에 출연하는 김준현이 시무룩해지는 상황을 당하면, 그의 별명 돼지에서 를 따고, ‘시무룩에서 무룩을 붙여 돼무룩이라고 하는 것이다. 백무룩은 백종원의 성과 무룩을 붙인 말이다. 데무룩은 12일에 나오는 데프콘의 데와 무룩을 붙인 말이다. 말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가히 제우스 신 찜쪄먹을 정도이다.

 

나는 이런 말과 글을 보면 왜 말을 저렇게 만들어 쓸까싶은 생각이 든다. 그냥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화면에 나올 때 시무룩이라고 자막을 넣어 주면 그만일 텐데. 웃기려고 그랬을까. 어떤 사람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화난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재기발랄함과 창의력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하지만 이건 새로운 말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이 말이 신조어 자격을 얻게 된다면, 이우기의 우를 붙여 우무룩, 박근혜의 혜를 붙여 혜무룩도 만들 참인가. ‘시무룩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리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글을 만난다.

살쪘다...(돼무룩)’, ‘먹부림 뒤에 오는 돼무룩’, ‘돼무룩해진 날’, ‘식단일기 34일차 돼무룩’’, ‘또 찌겠네여...돼무룩주로 음식, 살과 관련한 내용들이다.

마이리틀텔레비전 백종원ㅋㅋㅋ백무룩!’, ‘백무룩 백주부 요즘 대세’, ‘텔레비전 백종원 떡볶이 레시피 동영상, 백무룩 백종원 굴욕’, ‘백무룩부터 백설탕까지, 별명 부자 백종원’, ‘집밥백선생 백종원, 산통 깨는 김구라에 당황+백무룩’’ 백종원과 관련한 말들이다. 

데무룩이라는 말도 트위터, 블로그, 카페, 일반 웹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무슨 뜻으로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모두 데프콘과 관련한 이야기는 아닐 터이니. 덕무룩도 나온다. 초대형 고무오리 러버덕이 석촌호수에 등장한 지 몇 시간 만에 바람이 빠졌는데, 러버덕에서 덕과 시무룩에서 무룩을 붙여 덕무룩이라고 한 것이다. 가관이다.

 

나는 이런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많은 사람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가 보다. 이런 것도 우리 말과 글을 풍성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한때 유행어로 쓰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인데, 바쁜 세상에 그런 것까지 따따부따할 겨를이 어디 있나 싶은지도 모르지. 하지만 병이 깊은 나는, 이런 방송 자막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짜증나고 또한 부끄럽다.

 

2016.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