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텔레비전을 보니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말(화면 자막)이 있다. 그래서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말이다. 이 방송, 저 방송 가리지 않고 주로 오락 방송에 자주 등장한다. 무식해서 그런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케미’가 그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 생각한다.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 가운데 이 말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말을 왜 쓰는 걸까. 이런 말을 쓰면 유식해 보일까. 시청자, 국민이 잘 모르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방송에서 내보내도 되는 걸까.
누리집에서 검색해 보았다. ‘케미’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신문, 방송 제목이 수백, 수천 가지나 쏟아져 나온다. 기절하겠다. 나같이 어리숙한 사람은 이런 말이 이렇게 유행하도록 통 모르고 있었지만, 이 말은 이미 대중화한 게 아닌가. 정말 깜짝 놀랄 일이다.
몇 개만 소개하면 이렇다.
‘가화만사성’ 원미경·김지호, 웃음꽃 대화 ‘알콩달콩 고부케미’
‘꽃미남 브로맨스’ 남주혁-지수, 케미 폭발하는 부산 여행기 ‘깨방정까지’
주상욱 차예련 커플룩 몰아보기 ‘케미’ 먹구름 ‘배려’ 맑음
‘동네변호사 조들호’ 박신양·강소라, 첫 만남부터 특급 케미 자랑
‘몬스터’ 첫방, 이기광X이열음 미친 케미 빛났다
대강 보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만하다. ‘잘 어울린다’는 뜻 같다. ‘조화롭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이가 좋다’는 뜻으로도 쓰임직하다.
누리집 ‘다음’에서 다시 확인해 보니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화학작용을 뜻하는 영어 단어 케미스트리(Chemistry)의 줄임말로, 이성 간에 서로 강하게 끌리는 감정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두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분위기나 느낌이 좋을 때 ‘케미가 좋다’, ‘케미가 폭발한다’는 식으로 쓰인다. 2014년 SBS에서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의 여주인공 천송이(전지현 분)가 도민준(김수현 분)을 향해 “내 말 잘 들어봐. 사람과 사람 사이엔 ‘케미’가 존재해”라며 “나는 케미 덩어리다. 모든 남자들이 날 보면 활활 타오른다”고 하면서 대중화되었다. 궁합이 잘 맞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별에서 온 그대’는 인기만큼이나 유행어도 많이 낳았나 보다. ‘어마무시하다’도 이 연속극에서 나왔다고 들은 적이 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가서 보니 누군가 이에 대하여 물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chemistry는 ‘화학, 화학적 성질, 화학 반응’을 뜻하는 영어 표현으로 현행 사전에는 ‘케미스트리’가 별도로 등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를 외래어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제시하신 바와 같이 최근 많이 사용하고 있는 신조어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라고 해놨다.
‘케미’는 외래어도 아니고 그냥 외국어, 아니 국적불명의, 정체불명의 말이다. ‘케미스트리’라고 하면 영어를 배우는 외국인은 알아듣겠지만, 그냥 ‘케미’는 이도저도 아니다. 이런 말은 한때 유행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점점 널리 쓰이다 보면 외래어의 자격을 얻을 수도 있고, 나중에는 완전한 우리말 노릇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케미’가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동안 우리말 ‘조화’, ‘어울림’, ‘끌림’, ‘사이 좋다’와 같은 말이 그만큼 점점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케미’를 아는 사람(주로 젊은이)과 모르는 사람(주로 늙은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말 뜻을 제대로 모르면서 유행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쓰는 얼뜨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어 내겠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본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을 뽑을 때 국어시험보다 국적불명의 말을 누가 잘 만들어 내는지 시험을 보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는 기상천외한 말을 아무렇게나 갖다 쓰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강심장을 가진 사람을 직원으로 뽑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의심해 본다. 신문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한글날 다가오면 또 온갖 호들갑을 떨겠지.
2016.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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