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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알코올성 치매일까

by 이우기, yiwoogi 2015. 11. 21.

금요일 저녁은 조금 바빴다. 학과 동문회에 가서 마주앉은 선배들 웃음 안주 삼아 좀 마셨다. 소주 한 병은 더 마셨지 싶다. 그러고서 말티고개를 넘어 초전동에 있는 고깃집으로 갔다. 동네 아는 동생 생일잔치가 열린다기에 꼭 가겠다고 다짐하던 터였다.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고개를 넘어가면서 조급증이 일었다. 배부르니 안주도 별로 먹지 않은 채 허겁지겁 마셨다. 한 병 반은 더 마셨지 싶다. 그토록 좋아하던 된장국수도 몇 젓가락 못 먹었다. 11시쯤 집에 갔다. 어떤 사람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로서는 정말 불타는 금요일을 보낸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는 무겁고 속은 부글거린다. 냉장고에 있는 순두부를 꺼내 집밥 백선생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찌개를 끓였는데 짜다. 아주 짜다. 너무 짜다. 소태 같다. 너무 싱거우면 안 될 듯하여 소금을 넣었고 빛깔이 너무 말금해서 진간장을 넣었고 깊은 맛을 내기 위하여 새우젓을 넣었다. 언뜻 생각하니 된장도 넣은 것 같아 집된장도 한 숟갈 넣었다. 바보가 따로 있겠나. 건더기만 어찌어찌 건져먹고 국물은 거의 먹지 않았다. 학교로 와서 물을 한 컵 이상 마셨다. 그래도 입안이 텁텁하고 바싹바싹 마른다. 술은 덜 깬 듯하다.

 

845분쯤 학교 도착하여 물 한 잔 마시고 카메라 메고 행사 사진 찍으러 간다. 대학본부에서 사회과학대학까지 거리는 100미터쯤 된다. 9시에 행사 시작하는 줄 알고 카메라 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는데 사회과학대학 근처에 차가 별로 없어서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930분에 시작한다고 안내되어 있다. 그냥 기다릴까 하다가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길바닥을 보니 벚나무 이파리들이 빨갛게 노랗게 누렇게 거멓게 점점이 떨어져 있다. 찬란하던 4월의 꽃잎도 잊어버리고 화려하던 10월의 단풍도 잃어버린 채 11월 어느 토요일 느닷없이 떨어져버린 벚나무 이파리를 보면서, 인연이라는 것의 무상함과 천하에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동시에 잠시 느꼈다. 그러고서 사무실에 돌아와 내가 써 놓은 보도자료를 보니 시작 시각이 930분이라고 돼 있다. 치매 증상이라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925분쯤 다시 카메라 메고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아직 많은 잎사귀를 달고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를 보고서는 사진을 찍었다. 희한하다. 교내에 있는 대부분의 느티나무들은 벌써 잎을 모두 떨궈버리고 나목(裸木)으로 서 있는데 사회과학대학 가는 길목의 느티나무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기에, 무엇을 보며 놀기에, 무엇을 생각하며 즐기기에 아직 저렇게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천하에 모든 것은 다 제각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과학대학 1층에서 조교 선생을 만났다. 지금 곧 행사 시작하느냐 물으니 10시에 시작한다고 한다. 930분부터 참가자들이 등록하고 10시에 시작한다고 한다. 그냥 기다릴까 하다가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학생들은 무슨 행사를 하려는지 걸상과 책상 들을 들고 낑낑거리며 지나간다. 들어보니 운동장 쪽에서 함성이 인다. 어느 학과 동문회라도 하는 모양이다. 한쪽에서는 형평운동에 대해 토론하고 한쪽에서는 선후배들이 모여 운동하고 또 한쪽에서는 어느 누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좀 더 시간이 지나 다시 카메라 메고 걸어간다. 세 번째 도전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행사장이 3층인데 두 번 다 1층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는다. 복도 많다고 생각하고 운도 좋다고 생각한다. 머리는 나쁘다. 할 수 없다. 나쁜 건 그래도 치매는 아니잖느냐 생각한다. 아전인수다. 행사장에 105분 전에 당도하였는데, 아뿔싸! 총장님이 인사말을 하고 계신다. 원래 계획에는 총장님 축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인사말을 거의 끝낼 즈음인가 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얼른 찍었다. 몇 장 더 찍을 여유를 주기 위하여 일부러 끝맺는 말씀을 조금 더 길게 해 주신 것 같다. 4년 동안 해오는 일인지라 서로 사인이 맞는 것 같다, 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 뒤에 이어진 몇몇 분의 인사말 하는 모습과 첫 발표자가 주제발표를 하는 것까지 몇 장 더 찍고 돌아왔다. 한 행사에 세 번이나 가는 건 처음이다.

 

2015.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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