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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죽순초무침

by 이우기, yiwoogi 2015. 5. 25.

아버지 산소 옆에 대밭이 있다. 우리 땅인 줄 알고 있는데 아닐지도 모른다. 측량을 해봐야 할 듯하다. 벌써 십 수 년째 이 대밭에서 죽순을 캐 먹는다. 대밭에선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본 적 없고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 죽순 캐 간 흔적을 본 적도 없다. 그러니 우리 대밭이라 여긴다. 아니다. 대밭은 공동소유다. 멧돼지들이 대밭을 자기 텃밭으로 삼아 죽순이 올라오는 족족 캐 먹는다. 단단한 콧등으로 땅을 파헤쳐 죽순을 캐 먹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죄다 쓰러트려 놓기도 한다. 고약한 공동주인이다.

죽순이 한창 올라올 5월 어느 연휴 오후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 한 분과 아내와 함께 죽순 캐러 갔다. 우후죽순이라. 올 봄에 비가 좀 잦았으니 죽순이 제법 자랐을 것이다, 생각하고 해거름에 대밭으로 향했다. 지난주에 어머니와 한 약속이다. 대밭은 그리 넓지 않다. 대는 왕대다. 제대로 잘 자란 대는 두 손으로도 못 잡을 정도이다. 하도 관리를 안 하니까 늙은 대는 스스로 쓰러져 썩고 이제 올라오는 죽순은 왕대들 사이를 뚫고 자랄 엄두를 내기 힘들다. 방치된 대밭에서 먹거리를 캐는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모기다. 모기를 집모기, 산모기, 풀밭모기, 대밭모기, 바다모기, 강모기 하는 식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단연 대밭모기가 가장 심술궂고 강력할 것으로 생각한다. 대밭에 들어서자마자 귓등에서 앵앵거리기 시작하여 끝까지 따라다닌다. 그사이 목덜미와 귓등과 얼굴과 팔꿈치와 허벅지 등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문다. 옷을 입고 다녀도 어쩔 수 없다. 대밭에 가려면 먼저 모기약을 몸에 잔뜩 발라야 한다. 거미줄도 만만찮으니 창이 있는 모자를 쓰면 더 좋다. 대밭에 들어서면 어쩔 수 없이 어릴 적 흑백영화부터 떠오른다.

시골에서 살 때 우리 집은 대밭 속에 있었다. 집 뒤도 대밭이고 집 앞도 대밭이었다. 뒤란에는 대밭에서 줄기차게 뻗어온 대나무 뿌리가 촘촘한 마디를 보여주며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곤 했다. 그런 것을 잘라 회초리로 쓰는 선생님도 있었다. 겨울밤 작은방에서 군고구마 먹으며 바람에 댓잎 부딪는 소리를 들었고 한겨울 폭설에도 부러지지 않고 무거운 눈을 견디던 대를 보았다. 정월대보름 달집에서 탁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타던 대울음도 들었고 우리의 가오리연, 방패연이 되어주던 대도 보았다. 굴렁쇠 자루도 대로 만들었고 활과 화살도 만들어 놀았다. 그러면서 자랐다. 대나무 마디마다 아련한 추억이 걸려 있다.

어머니 집에서 죽순을 삶았다. 데친다고 해야 하나. 마대자루 한 가득 캐었으나 집에서 이리저리 다듬고 나니 양이 쑥 줄었다. 큰 솥에 물을 자작하게 붓고 불을 피운다. 조금 있으니 죽순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 형제들이 모이면 반찬으로 해먹게 어머니 집에 많이 남겨두고 우리 몫으로 조금 가져 왔다. 앞으로 죽순을 이렇게 저렇게 해먹을 생각에 밤새 기분이 좋았고 눈 뜨자마자 그 생각부터 하니 또 기분이 좋다. 모기에 물린 팔꿈치가 밤새 가려웠는데도, 입에 침이 고이는 순간 모든 게 좋고 괜찮다.

아내는 아침 일찍 죽순들깨무침을 만들었다. 죽순을 잘게 썰어 약한 불에 데치다가 들깨를 적당히 넣는다. 실제 무엇 무엇을 넣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지 않았는데도 맛있다. 저녁에는 죽순초무침을 했다. 초무침을 하기 전에 낌새를 모를 리 있나. 가게 심부름 가는 길에 막걸리 한 병을 사왔다. 초무침은 새콤 달콤 매콤하다. 좋아하는 반찬 겸 안주 가운데 하나이다. 저녁을 먹으며 아침에 만든 들깨무침은 거덜내고 저녁에 새로 만든 초무침도 접시를 비웠다. 내일 또 해준다고 하고 막걸리는 절반이나 남았으니 기분이 흐뭇해진다.

죽순은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식으로 좋다고 한다. 주성분으로는 당질, 단백질, 섬유질이 많이 들어있는데 변비에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칼륨이 염분 배출을 도와주므로 혈압이 높은 사람에게도 권할 만한 식재료라고 한다.

우리는 죽순을 잘게 썰어 한 번 먹을 만큼 조금씩 포장하여 냉동실에 넣어둔다. 라면은 물론 김치찌개, 된장찌개에 넣어 먹어도 되고 이런저런 반찬으로 만들어 먹어도 그만이다. 한 해 동안 먹을 반찬거리 겸 안줏거리를 장만해 놓고 나니 마음 든든하다2015.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