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2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집 마루의 약간 기울어지고 너덜너덜한 흙벽에 커다란 거울이 하나 걸렸다. 거울 유리는 정말 깨끗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듯’이라고 할 때 그 은쟁반같이 보였다. ‘수정같이 밝은 달’이라고 할 때 그 수정 같아 보였다. 키 작은 나도, 나보다 큰 작은형도, 더 큰 큰형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번에 비추어 주었다. 거울에 비친 마당과 빨랫줄에 걸린 빨래, 감나무, 대밭, 앞집, 앞산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금색으로 칠한 거울 테두리는 맑은 날엔 수채화를 담은 액자가 되었다가 비오는 날엔 수묵화의 액자가 되기도 했다.
거울의 맨 위 한가운데는 ‘장한 어머니 상’이라는 글씨가 흰색으로 쓰여 있었다. ‘어버이’ 상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내 기억엔 어머니 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안간국민학교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거울은 안간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수여한 상이었다. 우리는 개근상, 우등상 따위 몇 가지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어찌하여 이름도 거창한 ‘장한’ 어머니 상을 받은 것일까.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하기로 큰형이 6학년, 작은형이 4학년, 내가 2학년…. 이렇게 세 아들이 나란히 한 국민학교에 다니니, 그 고단함과 힘겨움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상이 아니었나 싶을 뿐이다. 육성회비 늦지 않게 꼬박꼬박 잘 내고 운동회 때 어머니 달리기 대회에도 빠지지 않고 출전하던 것을 누구의 담임선생님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눈여겨보셨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41년 생 어머니는 1936년 생 아버지와 결혼하여 1963년 생 첫 아들을 낳은 뒤 내리 세 아들을 더 낳았다. 결혼할 때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휴가 나와서 결혼했다고 들었다. 중간에 딸이 하나나 둘 있었더라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어머니는 혼자 도맡아 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땔감을 장만하여 안간에서 진주까지 오십 리 길을 수레를 끌고 하루 만에 왔다 갔다 하셨다. 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어머니는 뒤에서 허벅지, 장딴지가 팍팍해지도록 힘을 주어 수레를 미셨다. 상봉동 가마못재를 넘기도 하고 초전동으로 들어와 말티고개를 넘기도 하셨다. 그러면 쌀 한 가마니 살 수 있을 정도 벌었다. 논밭이 없어 남의 땅을 소작 부쳤다. 별 지는 새벽부터 저녁별 뜰 때까지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억척같이 우리를 교육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육성회비, 등록금 같은 건 절대 빠뜨리지 않았다. 날짜를 까먹어 학교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적은 있어도 집에서 돈을 주지 않아 낭패를 당한 일은 없었다. 책이나 가방 같은 것도 어찌어찌하여 해결했다. 고급은 아니었지만 가방 없어 학교 못 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가방 대신 보자기로도 충분히 넉넉하던 시절이니까. 명절엔 네 아들들 검정고무신도 새것으로 사주었다. 나중에 고무신은 운동화로 바뀌었다. 형제들은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사고치지 않고 결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싸우거나 남의 것 훔치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를 반듯하게 키워주신 것이다. 장한 아버지, 장한 어머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한 아버지는 일흔일곱 되던 해인 2012년 9월 돌아가셨고, 장한 어머니는 홀로 사시면서 황혼을 즐기고 계신다. 경로당에서 주말 회식도 하고 여행도 가신다.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자주 다니시지만, 정신과 생각은 밝고 맑다. 사랑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장한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생각해 본다. 201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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