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봉성당에 갔다. 가야할 것 같았다. 누구는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고 누구는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옥봉성당에서 본 건 사진과 비디오였다. 사진은 깨지고 으깨어지고 문드러진 사람들의 얼굴이 크게 확대된 것이었다. 피가 낭자하였다. 군인이 있었고 젊은이들이 있었다. 곤봉으로 내려치는 장면도 있고 질질 끌고 가는 모습도 있고 순박하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의 사진틀 위에 턱을 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비디오는 조악했다. 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뒤섞였다. 굉장한 무엇이 터진 것 같은, 마치 전쟁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싹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5ㆍ18은 툭 튀어져 나온 눈알로 나를 바라보았고 잘려버린 손으로 나를 건드렸다. 뭉개져버린 입으로 말을 걸었다. “나를 좀 보아 달라.”고 했다. “진실을 알고 실천해 달라.”고 했다. 1986년 대학 1학년 때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읽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건 거짓역사였다. 군인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무력집단이라고 배운 것은 거짓이었다. 민주와 정의로 합쳐진 그 정당은 민주도 아니고 정의는 더더욱 아닌 괴물이자 악의 화신으로 보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9년 10ㆍ26으로 박정희가 죽고 12ㆍ12로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군사반란)를 일으켰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총칼로 짓밟은 뒤 권좌에 올라앉았음을 알게 되었다. 반대 시위가 가장 거셌던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역사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아카시아 향기 가득하던 5월 어느 날이었던 것이다. 우리 국민인 사람이 죽음을 넘고 시대의 어둠을 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왜에 부역(附逆)한 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떵떵거리며 살아남았다. 6ㆍ25전쟁이 터지자 좌익을 색출한다며 적반하장의 몽둥이를 든 자들은 바로 일제 앞잡이들이었다. 그들을 단죄할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은 무자비한 폭력에 박살났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거의 유일한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4ㆍ19혁명으로 되살아나는 듯하던 정의와 평화와 민주주의는 5ㆍ16쿠데타로 다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동안 독재가 이어졌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사전 속에만 있는 단어가 되었다. 10ㆍ26은 필연이었다. 하지만 18년 독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말았다. 5월 광주는 우리나라에 민주, 자유, 평화, 인권, 복지 같은 개념을 제대로 세울 절호의 기회를 누가 어떻게 뺏어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사건이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서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서도, 참여정부가 들어서서도, 우리는 이런 기막히고 기구하고 안타까운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국민의 이름으로, 역사의 이름으로 처벌받지 않은 죄인들이 아직도 대명천지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과 한통속이었거나 그들의 졸개이던 자들이 다시 민의를 왜곡하며 역사 앞에 죄를 짓고 있다. 저들을 어찌할 것인가. 5ㆍ18은 자꾸 우리에게 말을 건다. 201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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