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세기의 대결’을 보고난 뒤의 씁쓸함

by 이우기, yiwoogi 2015. 5. 3.

세기의 대결이라는 권투 경기를 봤다. 신문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기에 궁금증이 인 것이다. 경기 내내 조마조마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 남은 것은 지독한 씁쓸함이다. 이런 경기를 왜 하는 것이며, 한다고 그걸 비싼 돈 들여 굳이 보여주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각의 링 안에 두 선수를 가둬놓고 치고받게 한다. 링 바로 옆까지 바짝 들어찬 관객들은 두 선수의 싸움을 즐긴다. 껌을 찍찍 씹어대면서. 소 두 마리를 경기장에 집어넣고 싸우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 두 마리를 가둬놓고 죽을 때까지 물고 뜯으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다. 닭 두 마리를 닭장에 넣어놓고 꼬꼬댁거리며 싸우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의 잔인함을 본다. 잔인함을 즐기기 위해 선수들 가족들까지 링 곁에 모여 앉았다. 비극이다.

두 선수는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는가. 순전히 돈 때문에 싸우는 것 아닌가. 경기 내내 누구도 넘어지지 않고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런데 아나운서는 싱거운 경기, 대전료가 아깝다, 이름값 못하는 경기 내용이라고 비난한다. 사람인가. 그 정도 했으면 된 것 아닌가. 꼭 눈 찢어지고 피 터지고 한 선수가 링 바닥에 널브러져야 속 시원한가.

관객들은 12라운드 36분 경기를 보기 위해 얼마를 냈을까. 링사이드 좌석 암표 값은 25만 달러(27000만 원)란다. 대전료는 25000만 달러(2700억 원)이다. 한 명이 1619억 원, 다른 한 명이 1079억 원을 챙겼다. 12라운드까지 갔으니 두 선수는 1초당 12000만 원을 번 셈이다. 시곗바늘이 재깍하는 순간 12000만 원을. 내로라하는 세계의 방송들이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중계료는 얼마였으며, 사이사이에 빼곡히 끼워 넣은 광고는 얼마짜리였을까. 돈 잔치 제대로 했다. 최저임금 1시간에 5580원의 나라에 사는 나는 허탈하다. 2014년보다 7.1%나 올랐는데도 6000, 설렁탕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나라에서 세기의 돈 잔치를 보고 있자니 역겹다.

경기를 보면서도 내가 왜 이걸 보고 있지?’ 하는 생각을 했다. 텔레비전을 끌 수 없었던 것은 혹시 누가 코피 흘리고 눈 찢어질까봐 걱정되어서였다. 김득구 선수 같은 사고가 일어날까봐 조마조마해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릴 때 남의 집 흑백텔레비전 앞에서 유제두, 장정구, 홍수환, 박종팔 선수를 보며 자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을까. 철없이 보던 권투는 짜릿짜릿했고 외국선수와 싸울 때는 애국 근육이 불끈불끈 치솟기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2015.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