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협상다운 협상이나 이의제기라고는 해볼 생각도 못한 채 연봉이 동결될 수 있는 계약직 월급쟁이로는 뾰족한 수가 없겠다 싶어 요행수를 바라고 로또를 산다. 이전에 주택복권도 사봤고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한창 요란을 떨던 밀레니엄복권이라는 것도 샀었다. 정말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 골똘히 생각해본 적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은 잠시잠깐이지만 스스로 행복감에 도취된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부끄럽고 민망해진다. 초라해지기도 한다.
요즘은 굳이 로또에 당첨되고 싶어 사는 게 아니라 누구인지 모르지만 당첨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당첨금을 가져가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댄다. 번호에 대해 전혀 고민 없이 자동으로, 그것도 대부분 술김에, 5000원어치를 사고 마는 성의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 복에 1등은 언감생심이고 2등도 기대난망이니 3등에라도 한 번 돼 봤으면 하는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면 보험 약관 대출로 공사비를 충당한 화장실 보수비를 벌충하거나 결혼 17년 만에 세탁기는 24개월 무이자 할부로 겨우 바꿨으니 이번에는 골골거리는 냉장고를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000원어치 로또를 사면 숫자가 가로 6개, 세로 5개 하여 30개인데 겨우 2개, 아니면 3개가 띄엄띄엄 맞는 것을 보면 애당초 요행 같은 건 깨끗이 잊고 살아야 했었다. 심지어 30개 숫자 가운데 하나도 맞히지 못할 때가 허다하니 아니할 말인가. 월요일 사면 엿새 동안, 수요일 사면 나흘 동안, 토요일 사면 그날 하루라도 설레는 마음이 있다. 월요일 사면 목요일쯤엔 까먹고 있다가 우연히 지갑을 열어 보고는 빙그레 웃는 일도 있다. 바보가 따로 없다.
원 안에 있는 사람은 원 밖에 있는 사람의 삶과 생각을 모른다. 원 안에서는 도시가스가 1년 12개월 끊이지 않고 공급되어 보일러도 가스레인지도 아무런 걱정 없이 쓰지만, 원 밖에 사는 사람은 엘피지(LPG) 가스가 하필 명절 전날이나 무슨 잔칫날 떨어지는 경험 때문에 늘 신경을 쓰며 산다. 원 안에서는 계절이 바뀌면 어떤 옷을 사 입을까 골똘히 궁리하지만, 원 밖에서는 폐업처리 부도처리 땡처리 하는 옷가게가 어디쯤 있었던지, 아니면 새로 생긴 아울렛 매장에서조차 할인행사를 언제쯤 하는지 찾아보게 된다.
원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학원에 과외까지 동원할 수도 있고 조금 잘한다 싶으면 미국으로 영국으로 쫓아 보낼 작전을 짜겠지만,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인이 되어 있기도 하겠지만, 원 밖에서는 자식새끼가 공부를 좀 잘한다 싶으면 멀리로 보내고 싶긴 한데 등록금에 하숙비에 생활비까지 감당 못해 고개 돌려 슬프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원 밖에 있는 사람은 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로또를 산다. 원 밖에서 월급쟁이로, 그것도 계약직 월급쟁이로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댔자 원 안으로 들어갈 열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 밖에서 하루 일해 하루 먹고사는 자영업으로는 성공이란 열쇠를 거머쥐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원 밖에서는 아무렇든지 간에 정년까지 사고치지 않고 건강하게 직장생활 잘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지만, 원 안에서는 이 일 하다가 수틀리면 때려치우고 저 일을 해보고 그것도 마음에 안 들면 사업이나 해볼까 궁리를 대고 있을 것이다.
원 밖에 있는 사람이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고 하자. 이제 원 안으로 들어갈 열쇠를 얻었다. 원 밖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원 안으로 들어가면 그는 행복해질까. 펜트하우스에서 기름진 음식 먹고 미국, 일본, 유럽 여행 다니며 자녀들에게 외국 국적을 얻어다주면 행복해질까. 평소 많이 얻어먹었으니 이제부터 열심히 사주며 배 두드리면서 살면 행복해질까. 수백만 원짜리 옷 걸치고 지리산, 한라산으로 놀러 다니며 맑은 공기 마시면 행복해질까. 고급 양주 마시고 외제차 운전하며 도로를 질주하면 행복해질까.
로또를 사면서 생각에 잠긴다. 원 안에 들어가 봤자 결국 사는 건 그게 그건데. 삶의 행복은 원 안이든 원 밖이든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인데. 아니 원이란 애당초 있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그래도 1등, 2등은 관두고 3등에라도 당첨되어 냉장고나 바꿨으면, 4등에라도 당첨되어 식구들 데리고 어디 맛난 곳 외식이나 다녀오면 좋겠다 싶은 유혹은 뿌리칠 수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가 문득, 뭘 그리 오래 생각하고 있는지 싶어 보는 이도 없는데 괜스레 계면쩍어진다. 201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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