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참 좋은 말이다. 찾아보니 사불범정(邪不犯正)이라는 말도 있다. 바르지 못한 것이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참 좋은 말이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다. 정의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이다. 플라톤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정의라고 했나 보다. 뭔 말인지….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죄는 지은 데로 가고 덕은 닦은 데로 간다.”라고 늘상 말했다. 이런 말을 들으며 바르게 살아야겠다, 착하게 살아야겠다, 정의롭게 살아야겠다, 나쁜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남을 도우며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들을 했다. 처음 얼마 동안 나쁜 짓을 저질러도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어서 결국 벌을 받게 된다. 나라와 겨레를 배반하면 큰 벌을 받고 자손만대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더러 나쁜 짓도 하고 더러 나라에 죄짓기도 했지만 교도소 갈 정도는 아니었다 싶은데, 사필귀정 이런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던 덕분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과연 사필귀정일까 의문을 갖게 된다. 나라 팔아먹은 대표적 매국노 이완용의 재산은 현재가로 환산하면 600억 원쯤 된다는데 친일재산환수법을 2005년 12월 제정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6961만 원밖에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 중에서는 ‘친일 매국’을 역사적 죄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특히 이 법을 집행해야 할 사람들의 인식이 의심스럽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보기관의 장이 직원들을 동원하여 댓글 공작으로 여론을 조작했는데도 그 실체적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짓을 나쁜 짓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들이 들어간다는 정보기관의 직원들은 자신이 가진 뛰어난 재주와 명석한 두뇌를 기껏 그런 일에 써먹고도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보다. 이건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여 수백 명이 죽거나 실종했을 때 “누가 배 타고 놀러가라고 했느냐?”던 아주머니들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당한 뒤 병원에 드러누워 있자 그 병원 앞에 가서 온갖 생쇼를 다하며 “사랑합니다.”고 외치는 이런 황당무계하고 후안무치한 상황은 정(正)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다 치고, 세월호의 진실을, 천안함의 진실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될까. 지금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있는 모든 사실은 진실일까.
2011년 8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반대한다며 주민투표를 벌였다가 결국 시장직까지 내놔야 했던 사실이 잊히지 않았고, 그 이후로 전국 모든 광역 지방자치단체가 무상급식 예산을 지원하고 있는데, 유독 경남만 못하겠다고 하는 건 정(正)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이라면 경남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자체가 반(反)이라는 말일까. 정말 사필귀정인지 알려면 역사적 평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1970년 11월 13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사망했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는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와 재산가압류를 견디다 못해 분신해 숨졌다. 2015년 2월 16일 금호타이어 곡성 공장에서 일하던 김재기 씨는 회사 도급화에 반대하며 스스로를 불살랐다. 흔치 않은 노동자 분신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다. 주요 신문과 방송도 김 씨의 분신을 다루지 않거나 단신으로 처리했다. 일부 언론은 “부부싸움 뒤 집을 나갔다는 아내의 신고가 접수된 뒤”라며 김 씨가 부부싸움 때문에 분신한 듯 보도했다. 사필귀정이라면 1970년에서 2015년까지 45년 동안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나랏일을 하겠다는 사람을 앉혀 놓고 청문회를 하다 보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병역비리, 위장전입, 탈세, 투기…. 이 정부 들어서 총리ㆍ장관 후보자 37명 중 절반이 넘는 19명이 위장전입 논란에 휩싸였다는 보도를 보면 참담하다. 이 정부 2년간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표된 인사는 모두 5명이었다. 이 가운데 4명에 대해 위장전입 논란이 제기됐다.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집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것이 위장전입이다. 자녀를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하는 경우가 흔하고, 재개발 지역에서 속칭 ‘딱지’를 얻기 위해, 또 아파트 분양권을 얻기 위해 위장전입하는 사람도 많다.(<조선일보> 보도)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하고는 장관 자리에 앉는다. 국민들은 그걸 또 그냥 보고 있다. 이건 사필귀정일까. 만일 장관이 되려 하기 전에 위장전입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감옥으로 보내거나 벌금을 내도록 하거나, 최소한 장관직에 앉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렇게 되는 게 사필귀정 아닌가. 우리 사회에 사필귀정이란 게 있기나 한 것인가. 2015.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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