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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나이 듦과 늙어감

by 이우기, yiwoogi 2015. 3. 8.



욕실을 고쳤다. 욕조 귀퉁이에서 바닥 쪽으로 물이 계속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욕조에 물이 담겨 있지 않은데도 며칠 동안 찔끔찔끔 비어져 나오는 물을 보고, ‘아래층 욕실 천장으로 물이 새는 날엔 공사비가 몇 배로 들지 모르니 얼른 수리하자는 게 아내의 주장이었다. 백 번 맞는 말이었다. 하는 김에 진작 금이 좀 가 있던 변기도 바꿔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일꾼을 불러 견적을 내어보고는 며칠 동안 망설였다. 생각보다 꽤 많이 나온 것이다. 그때가 27일이었던가 보다. 아무튼 이러저러해서 공사 날을 잡고 돈은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설 쇠고 226일부터 사흘이나 걸렸다. 단순히 변기가 막힌 걸 뚫는 차원을 넘어서는 대대적인 보수공사였다. 욕조를 들어내고 바닥을 메우고 방수공사를 했다. 벽과 천장과 바닥의 타일을 갈았다. 세면기와 변기도 바꿨다. 수납장도 하나 넣었다. 그사이 우리는 본가에 가서 어머니에게 의지했다. 마침 아들은 봄방학 중이었고 나는 본가에서 출퇴근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는 적적함은 덜었겠지만 아침저녁으로 밥과 반찬을 신경 쓰느라 귀찮기도 했을 것이다. 아내가 도맡아 했지만 전혀 나 몰라라 하며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31일 일요일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과 함께 청소기 돌리고 물걸레질하며 부산을 떨었다. 좁은 화장실에 있던 물건들이 이 방, 저 방과 베란다로 옮겨져 있었는데 다시 화장실로 집어넣으려니 공간이 부족하다. 잡동사니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앉아 있었던가 싶었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우리 집 화장실은, 고급 호텔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봄맞이 새 단장이라는 것을 했다.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런 일을 강력하고 용의주도하게 초지일관 밀어붙이는 아내가 새롭게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전에는 세면기에 얼굴을 조준하여 전기면도기를 돌렸고 욕조에 머리를 디밀어 샴푸질을 했다. 10년 이상 몸에 익은 동작이다. 머리 감을 때 눈은 못 떠도 비누가 어디 있는지 수도꼭지는 어디 있는지 수건은 몸을 몇 도 정도 돌리면 손에 잡히는지 훤했다. 면도기, 비누, 치약, 칫솔, , 수건 등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마치 빈틈없는 로봇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었다. 그런데 이 로봇동작이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살았는데 몸에 익으려면 시일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익숙한 것, 습관,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일이 설레고 기쁘고 즐겁고 흥분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또 문제가 있다. 이전 세면기와 욕조와 변기는 짙은 자주색이었다. 전기면도기 날에 잘게 부서져 세면기로 떨어지는 수염이 어떤 색깔인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욕조에 떨어지는 비눗방울 속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새하얀 세면기에 떨어지는 그 무엇, 담배씨 만하기도 하고 후춧가루 같기도 한 그 무엇이 내 수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의 빛깔은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노르스름한 것도 있고 아예 흰빛도 검은색 사이에서 더러 보이기 시작했으니 아침마다 조금 슬퍼진다.

머리를 감을라치면 더하다. 욕조가 없어지고 하얀 세숫대야가 놓였다. 물을 받아 머리를 감고 나면 뿌연 거품이 뭉게구름처럼 떠다니고 그 사이사이에 너무나 뚜렷이 보이는 내 머리카락들. 슬픔을 조금 더 느낀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나이 듦과 늙어감을 화장실에서 보고 느낀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을, 그것을 외면할 수도 없음을, 그것은 이미 내 몸에 달라붙어 나와 오랜 벗이 되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날마다, 아침마다. 2015.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