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진주의료원, 그러니까 지금 진주중앙병원 근처에 동사무소가 하나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중안동쯤 되려나.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동사무소를 끼고 돌면 우정실비, 제일실비, 동백실비 따위 실비집이 도리뱅뱅 모여 있었다. 역시 요즘은 그 근처에 잘 가지 않고, 가더라도 눈여겨보지 않아 여태 있는지 잘 모르겠다. 거기서 우체국 옆을 지나 큰길로 가다보면 ‘청석골’이라는 막걸리집이 있었다. 롯데시네마 옆 건물쯤 되겠다.
1987년 12월 초 그 추운 겨울 밤 우리는 청석골에서 임꺽정 두령의 졸개들처럼 둘러앉아 막걸리를 말가웃 마셨더랬다. 안주랬자 두부김치, 파전, 노가리 등속이 전부였는데 노가리를 유독 많이 씹어 먹었다. 이가 부실한데도 엿 녹여 먹듯 노가리를 먹어댔다. 그해 초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고 6월에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죽은 뒤 국민들의 저항으로 6ㆍ29선언을 이끌어냈고 이후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모여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을 뽑던 데서 국민 직선으로 바뀌었다. 국민이 승리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국민이 승리한(것이라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 뒤를 잇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그해 12월에 열리게 되어 있었다. 야당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이 힘을 합하여 단일후보로 출마하면 6ㆍ29선언으로 차기 대선을 노리던 노태우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은 끝내 각자 따로 출마하여 노태우와 삼파전을 벌이게 되었다. 김종필도 나왔던가? 노태우의 별명은 노가리였다. 그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술자리에서 노가리 뜯어먹는 사람이 많던 시기였다.
우리는 청석골 막걸리에 불콰하게 취한 뒤 실비집으로 2차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 동사무소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우정실비가 보일 터였다. 동사무소 앞 담벼락에 붙여져 있는 대통령선거후보자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노태우 사진이 열 장 남짓, 김영삼 사진이 열장 남짓 붙어 있었다. 김대중 사진은 없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붙인 벽보가 아니라 후보자 쪽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갖다 붙여놓은 것이었다.
대학 2학년이던 우리는 그게 무슨 정의감이라고, 우리가 무슨 청석골 두령 임꺽정이나 된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벽보 두어 장을 찢어버렸다. 노태우도 찢고 김영삼도 찢었다. 노태우는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과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에 무조건 싫었고, 김영삼도 국민의 열망을 짓밟고 권력욕의 화신이 되었기에 싫었던 것이다. 모조리 다 찢어버리지 못한 것은 풀칠을 하도 야무지게 해 놓아서 손톱 끝으로 벽보를 집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서 보무도 당당하게 실비집으로 가려는 찰나, 누군가 우리의 어깨를 낚아챘다. “야, 이놈들! 꼼짝 마! 네놈들 이제 다 죽었다!” 술김이기도 하고 느닷없기도 하여 미처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그 우락부락한 손은 숫제 우리를 질질 끌면서 어디론가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동사무소였던 것이다. 거기에 동사무소가 있는 줄 우리가 알았겠나. 그것도 그 시간까지 공무원 몇이 퇴근하지 않고 누가 벽보를 뜯지나 않는지 감시하고 있을 줄 알았겠나.
순간, 뻣뻣하게 나가다간 어떤 죄를 뒤집어쓸지 모르겠다고 상황을 판단한 우리는 최대한 저자세로 나갔다. 술을 마셔서 장난삼아 그랬다, 누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한 번만 봐주면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우리는 착하고 선량한 대학생일 뿐이다…. 부끄럽고 또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청석골에서 한 박자 뒤늦게 출발한 다른 동료가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공무원들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잘못하면 콩밥 먹게 할 수도 있다, 건방진 놈들 어디서 까부느냐, 세상을 그리 삐딱하게 보지 마라 등등의 훈계를 한참 동안 늘어놨다. 굴밤도 여러 대 맞았다. 꿇어앉은 다리에 쥐가 내릴 즈음 우리는 풀려났다. 휴우, 살았다.
그날 실비집에서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에 없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욕은 못하겠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거나 또는 깔깔대며 낄낄대며 마셔댔다. 아까 그 공무원들이 옆자리에 와서 우리를 감시하지나 않는지 두리번거리면서, 우리는 비록 비겁하게 무릎 꿇고 애원하여 풀려나긴 했지만 할 짓을 속 시원히 잘했다 생각하면서 마셨다.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이겼고 김영삼은 몇 해 뒤에 김종필과 함께 노태우 다리 밑에 기어들어가 민자당을 만들었다. 그다음 선거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가 벽보 몇 장 뜯는다고 세상이 바뀔 건 아니었다. 몇 장이 아니라 죄다 뜯는다고 하여도 역사의 물길이 바뀔 리 만무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런저런 선거할 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붙인 선거벽보 말고 후보자 쪽에서 같은 벽보를 수십 장 수백 장 붙여 놓는 것은 불법이다. 요즘은 아예 그렇게 붙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그건 찢든 말든 거기에다 오줌을 갈기든 말든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닌 건 아니구나. 경범죄처벌법도 있으니. 그땐 몰랐었는데, 만일 그것까지 알았다면 동사무소 공무원들과 한바탕 논쟁을 벌였을 텐데…. 아둔한 우리의 지식이 한심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별로 재미없는 추억이다. 201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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