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소설 ≪봉순이 언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주인공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살 땐데, 식모 봉순이가 주인집 부엌에서 ‘새까맣고 반짝반짝하며 기인 생명체들’을 손아귀에 담아 훔쳐온다. 그것들은 ‘손아귀에서 놓여나자마자 서둘러 움직였고 이내 사라졌다.’ 봉순이는 나에게 말한다. “저게 돈벌레여. 저것이 득시글거리는 집은 돈이 꼬이게 되어 있댜……. 안집 정자가 내가 저걸 훔쳐갈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있는디…….” (28쪽)
장대동 굼턱 집에 살 때 우리 집 부엌 주인은 이 돈벌레였다. 부엌의 길흉화복을 맡아보는 신인 조왕신(竈王神) 구실을 맡고 있던 이 돈벌레는, 60~70년대에는 그렇게 높은 지위로 대접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온갖 약을 다 뿌리며 퇴치해야 할 바퀴벌레다. 더러움과 온갖 병원균을 옮기는 나쁜 곤충의 대명사. 아무리 퇴치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는 바퀴벌레. 우리 집 부엌 터줏대감은, 어머니가 들으면 서운할지 몰라도 놀랍게도 바퀴벌레였다.
나와 큰형이 자는 방은 부엌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당에서 부엌으로 가려면 우리 방을 에돌아가야 했다. 자다가 찬물 한잔 먹으러 나가거나 늦은 저녁 라면이라도 하나 끓이려면 우리 방에서 부엌으로 들락날락하는 게 훨씬 편하고 쉬웠다. 부엌문을 열면, 사스락 스스락 스르륵 일제히 사라지는 검은 생명체, 그것이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의 일사불란한 사라짐 또는 탈출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어디에 모여 집단체조도 하고 제식훈련도 하고 유격훈련도 하는 고등 곤충이 아니었을까.
바퀴벌레는 바큇과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란다. 현존하는 날개 달린 곤충 가운데 가장 원시적인 부류이다. 몸은 납작하고 실 모양의 긴 촉각이 있으며 몸 빛깔은 검은색이나 갈색으로 광택이 있다. 전 세계에 3500여 종이 있다고 한다.(다음 사전 참조) 3500여 종이라니….
놀라워라. 바퀴는 도대체 몇 마리였을까. 군인이었다면 오와 열을 맞춰 앞으로 나란히 시킨 다음 ‘앉으면서 번호’를 시키면 금방 세기라고 하겠지, 가만히 쌓여있는 연탄이었다면 가로 몇 개, 세로 몇 개, 뒤로 몇 개 하여 곱하고 곱하면 금방 숫자가 나오긴 하겠지, 쌀알이라면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한 됫박만 덜어 좀 귀찮더라도 세어본 뒤 몇 되인지만 재면 얼추 짐작이라도 할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쏜살만큼 빨랐고 눈 깜짝할 새만큼 재빨랐으며 크기도 모양도 빛깔도 제각각이었으니.
놀라워라. 바퀴는 부엌 옆에 쌓여 있던 검은 구공탄 연탄구멍으로도 들어갔고 시렁 위에 쌓여 있던 그릇들 틈서리에도 끼어들었고 부엌 바닥 갈라진 콘크리트 사이로도 스며들어 갔으며, 아뿔싸, 지금 마시려는 물을 담아 둔 주전자 주둥이로도 기어들어 갔으니. 삼선 슬리퍼를 집어던지고 파리채를 휘두르며 정 급할 땐 맨손을 내리쳤으나 그 날쌘 동작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나쁘고 지저분하고 징그럽고 더럽고 추악하고 날쌔고 눈치 빠르고 아무튼 용서할 수 없는 바퀴 놈들 같으니라구!
바퀴가 조왕신 구실을 하며 부엌을 점령하고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깜빡 잊고 부엌 불을 켰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나만 그랬겠나. 잦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거의 날마다, 형도 아주 가끔 그렇게 혼비백산하지 않았을는지. 밤 11시쯤 집에 돌아와 무심코 부엌 불을 켰다가 뒷덜미가 서늘한 적이 정말 많았다. 바퀴는, 그래서, 그냥 적이었고 다시 생각해도 죽여 버려야 할 적이었고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짓이겨 버려야 할 나쁜 곤충이었다. 세상에서 멸종시켜 버려야 할 다시없을 원수였다.
어쩌다 약을 먹은 바퀴가 마당 귀퉁이에서 비실비실 기어가다가 눈에 띄면 결단코 지나치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어 두고는 양초를 갖고 왔다. 촛농으로 그놈 무덤을 만들었다. 성냥개비를 무덤 위에 꽂고는 그걸 심지로 삼아 불을 댕겼다. 바퀴 타는 고소한(‘고소한’이라니!) 냄새가 한참 동안 진동했다. 놈들도 후각이라는 게 있으면 제 동료의 살타는 냄새를 맡고는 다른 집으로 집단이주를 하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지금 그걸 생각하면, 내가 고등동물이긴 한 걸까 싶어진다.
바퀴는 어쩌면 돈벌레였을까. 그 시절 우리는, 학생이던 내가 잘 알 리는 없었지만, 그리 큰돈은 못 벌어도 그냥저냥 먹고 살기는 했던 것 같다. 나는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사십이만 원이던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갈음되었다. 아버지는 사기꾼에게 오십만 원을 떼였지만 금방 극복했던 것 같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굼턱 집을 벗어나 봉래초등학교 앞 양지바른 독채로 이사를 했다. 수많은 바퀴들 한 마리 한 마리는 백 원쯤 벌어다 준 것일까, 천 원쯤 벌어다 준 것일까. 그럼 내가 죽여 없앤 돈은 얼마나 되었을까.
대학 일 학년 때 시화전에 시를 내었다. 선배는 나를 따로 불러 정색으로 윽박질렀다. “장난을 치는 거냐, 이상이고자 하는 거냐?” 내 시는 이랬다. 제목: 바퀴벌레. “바퀴벌레 한 마리가 우리 집 부엌에 나타났습니다. (…) 내가 나타나 부엌의 불을 켰습니다. 그러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도망갔습니다. (…) 나는 그날 밤 바퀴벌레를 죽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정도였으면 괜찮았겠지. 한 마리에서부터 열 마리까지를 두 번이나 세었으니 선배들이 오해할 만도 했다. 이상(李箱)의 <오감도>를 흉내 내긴 했지만, 나로서는 진심이었고 실화였다. 201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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