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길고 즐거운 작은설

by 이우기, yiwoogi 2015. 2. 18.

즐겁고 긴 하루다. 오전 840분쯤 본가에 가니 어머니 혼자 무를 썰고 있다. 가오리회를 준비하는 거다. 차례상에는 올리지 않지만 막걸리, 소주 안주로 삼을 파전을 굽기 위한 재료 준비에 들어간다. 거실에 종이를 깔고 도마를 놓고 부엌칼을 잡았다. 부추를 썰고 파, 당근을 썬다. 꽁꽁 언 홍합 덩이를 잘게 썬다. 손이 시리다. 그사이에 산적 재료를 꽂는다. , 우엉, , 게맛살 따위를 알록달록 예쁘게 끼운다. 가오리회 무침에 넣을 배도 두 개 두껍게 썬다. 수육용 돼지고기를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마당에 있는 가스레인지 가스가 떨어져 어머니는 급히 가스 집에 전화를 건다. 우리 집과 큰집에서 쓸 생선을 찐다. 행복슈퍼에 내려가 막걸리 다섯 병과 맥주 세 병을 사 온다. ‘좋은데이는 어머니가 며칠 전 한 상자 사놨다.

동생 가족이 온다. 동생은 파전을 굽기 시작한다. 큰형수 일하는 떡집에 떡 찾으러 갔다 온다. 아들과 조카가 나를 호위한다. 큰형도 온다. 파전 굽는 곁에서 큰형과 제수와 파전 안주 삼아 소주, 맥주, 막걸리, 소맥 되는대로 한잔씩들 한다. 어머니는 일요일 담근 싱싱하고 고소한 배추김치를 접시에 담아온다. 동생의 후배가 온다. 잘 익어가던 수육을 썰어 내온다. 격식도 없고 순서도 없이 한잔씩들 한다. 방에 있던 아들과 조카들도 젓가락을 들고 술상 곁에서 수육을 찍어 먹는다. 조카들은 수육이나 파전을 한 점씩 집어 경쟁하듯 제 아비 입에 넣어준다. 웃음이 나온다.

점심상을 차린다. 반찬이랄 것도 별것 없다. 먹던 돼지 수육에 파전, 김치가 전부다. 배추김치 옆에 깍두기가 놓인다. 김도 있었는데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밍밍한 국이 달달하다. 점심 먹은 뒤 큰형은 어머니를 도와 나물을 데친다. 취나물, 고사리, 버섯, 콩나물, 숙주나물 따위를 데치는데, 먹을 땐 이것~?” 싶어도 손이 많이 간다. 그러고 있는데 창원 작은형이 온다. 제수는 새로 밥을 안치고, 밥 되기 전에 수육, 파전 놓고 소주부터 차린다. 작은형수는 고기 몇 점 먹은 뒤 전 굽기에 들어간다. 전은 작은형수가 제일 잘 부친다. 전도 종류가 많다. 서대구이, 오징어 튀김, 고구마전, 산적, 명태전, 또 뭐였더라.

찬바람이 오락가락하는 마당에 비닐로 바람막이를 해 놓았다. 며느리와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배려다. 나는 그 옆에서 보조 일을 맡는다. 달걀을 깨고 밀가루를 푼다. 도마를 내어 오고 식용유 뚜껑을 딴다. 큰형은 차례상에 올릴 돼지고기를 삶는다. 거실에선 어머니가 가오리회를 무친다. 가오리 말고도 무, 미나리, 배 따위가 들어간다. 시고 달고 맵고 조금은 짜야 한다. 빛깔도 발갛기도 하고 벌겋기도 해야 한다. 형제들 중 나를 제외하면 다들 어머니의 가오리회를 무척 좋아한다. 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질긴 건 싫다.

전을 다 구운 뒤 이것저것 치울 것 치우고 설거지도 좀 돕고 거실에 앉으니 술판이 펑퍼짐하다. 안주랄 게 뭐 있나. 그저 먹던 수육에 파전, 가오리회, 그리고 정다운 이야기꽃이 곧 안주 아니겠나. 큰형수가 딸기를 가져오니 딸기향이 거실에 가득하다. 막걸리는 세 병을 비우고 나머지 두 병은 차례 지낼 때 쓸 것이고, 소주는 음일고여덟 병은 비웠지 싶고 맥주는 딱 한 병 비웠다. 그사이 조카들은 봉래초등학교에 공 차러 갔다 오고, 잘 사람은 자고, 시장에 나갈 사람은 나가고, 목욕 갈 사람은 가고, 마실 사람은 마시고. 무질서하고 맥락이 없었지만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잘도 돌아간다.

놀고 놀아도 때 되면 저녁밥은 먹어야 하는지라 어머니는 돼지 삶은 물에 시래기를 넣어 국을 끓일 참이다. 시래기 썰고 파 썰고 무 어슷어슷 썰어 넣는 건 또 내 몫이다. 청양초도 넣고 고춧가루도 조금 넣는다. 약간 취하긴 했지만 즐겁고 재미있다. 나간 사람들 돌아오고 자는 사람들 일어나 저녁을 먹는다. 배고픈 사람 먼저 먹고 덜 고픈 사람 나중에 먹고, 제수와 아내가 설거지를 한다. , 점심 설거지는 내가 했는데, 즐겁고 우습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또 커피를 마신다.

아들만 넷인 집에서 어머니는 총감독 겸 큰 일꾼으로서 쉴 틈이 없고, 며느리들은 제각기 도착할 시간에 도착하여 제 할 일 찾아서 하고, 아들들도 안에서 밖에서 이 일 저 일 돕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면서도 먹고 마시기 또한 쉬지 않는다. 작은설은 잔칫날이다. 맵다, 짜다, 싱겁다, 너무 익었다, 되익었다 하는 아버지 야단소리 어디에선가 들린 듯한데 환청인가. 그리고 조카 둘이 안 보일 뿐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나물 볶을 일은 어머니에게 맡겨 두고 일단 철수했다. 내일 아침 730분까지 본가에 다시 가면, 세배하고 떡국 먹고 이것저것 챙겨 안간 큰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또 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2015.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