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설거지를 더러 하는 편이다. 아내가 보기엔 늘 모자라다 싶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가령 설 연휴 기간인 어제 본가에서 저녁상을 내가 치웠다. 아이들 밥도 내가 차려 주었다. 어른들은 고스톱 판을 벌였다. 소고기 장조림 끓인 냄비에 밥을 볶았고 달걀말이를 했다. 달걀 다섯 개를 좍 펼쳐 한 번에 말기란 보통 내공이 아니면 힘들다. 아무튼 내가 차린 밥상이니 내가 치웠다. 나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하지 않으면 설거지를 안 하려고 엄살을 부린다.
첫째 따뜻한 물이 나와야 한다. 강원도 인제군에서 군대생활하면서 자기 식기 자기가 씻어 본 사람은 안다. 천하의 명품 세제가 있다 한들 뜨거운 물이 아니고서는 식기 구석구석에 묻은 기름때를 닦아낼 수 없고, 그건 나중에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 끊어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인다. 집에서는 목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한다지만, 손가락이 남들보다 조금 짧은 나는 고무장갑 손가락이 너무 길어 접시를 제대로 붙잡기 힘들다. 그래서 고무장갑은 절대로 끼지 않고 설거지를 하는데, 고무장갑 끼고 하는 날엔 반드시 접시 한둘을 깬다.
둘째 세제 거품이 잘 일어야 한다. 군대에선 빨랫비누를 썼다. 불쌍한 이등병을 위하여 부대 식기 당번을 셋 정해 놓고 아흔 명쯤 되던 동료 사병들의 식기를 도맡아 닦게 했다. 그때 빨랫비누는 정말 멋진 세제였다. 어쩌다 설거지를 하려고 주방에 섰는데 세제가 다 떨어졌거나 거품이 잘 안 나는 세제라면 나는 두말없이 그만두는 편이다. 쌀뜨물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쌀뜨물이 늘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릇에 뽀드득 소리가 나게 하는 건 거품이 퐁퐁 잘 나는 세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수세미도 마음에 들어야 한다. 세제 거품이 잘 일게 하는 것도 수세미이고, 그릇에 눌어붙은 반찬국물을 깔끔히 씻어내는 것도 수세미의 역할이다. 새 수세미는 뻣뻣해서 별로이고 너무 오래 된 수세미는 너덜너덜하여 세제가 잘 먹히지 않게 된다. 그러면 설거지하는 맛이 없다. 보들보들하면서도 손에 딱 잡히는 수세미는 설거지하는 맛을 돋워준다.
뜨거운 물, 거품 잘 나는 세제, 적당한 수세미, 이 셋만 갖춰지면 나는 어디에서든 안 가리고 설거지를 하는 편이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하동 사는 선배 집에서도 물론이고, 초전 사는 큰형 집에서도 물론이다. 밥 먹고 쭈뼛쭈뼛 누가 설거지를 하려는지 싶어 눈치 볼 게 뭐 있나. 먼저 벌떡 일어나 개수대로 달려가는 자가 임자이다. 본가에서도 가끔 하는데 본가에서는 어머니 눈치를 보는 아내나 제수 덕분에 나도 눈치를 좀 보게 된다.
설거지를 하면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같이 밥 먹은 사람들의 칭찬을 아주 많이 듣게 된다. 온가족이 다 모였을 때 셋째아들이 벌떡 일어나 설거지를 하는 광경은 그다지 흔한 풍경화는 아닌 시절이기 때문이다. 형제들끼리 있을 때도 그렇거니와 사촌형제들까지 모인 날엔 귀가 따갑도록 칭찬을 듣는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칭찬은 봄비가 대지를 적셔 뭇 생명을 소생하게 하듯이 우리 삶을 피어나게 한다. 칭찬하는 사람 얼굴에는 복사꽃 피고 칭찬 듣는 사람 얼굴에는 함박꽃 핀다.
둘째 식구들의 식성이나 성격을 좀 알게 된다. 밥그릇에 밥풀이 눌어붙어 있는 식구는 밥을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편이고, 국물을 많이 남긴 식구는 위장이나 대장이 건강하고 특히 혈압이 높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밥그릇 주변이 좀 지저분한 식구는 나잇값을 할 만큼 야무지지 못할 수도 있다. 밥상 위 반찬을 조금씩 남기면 그것을 다시 냉장고에 넣지 못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는 만큼, 웬만하면 모든 반찬을 싹싹 긁어먹는 게 설거지하는 사람 도와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셋째 그릇들을 몇 해에 한 번쯤은 바꿔주는 게 좋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건 덤이다. 남자 사람들은 무덤덤할지 모르지만, 살림하는 여자 사람들은 한 가지 접시나 밥그릇으로 몇 년, 더하게는 몇 십 년 이상 쓰는 것에 대해 남자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는다. 접시 서너 개만 바꾸고 간장 종지 한두 개만 바꿔도 밥상 분위기가 바뀐다. 그렇다고 일부러 접시를 깬 적은 없지만 어쩌다 설거지 도중에 부지불식간에 접시 이가 나가도 별로 아깝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건 정신건강에도 좋은 점이다.
설날에 하는 설거지는 유난히 그릇과 수저가 많다. 좀 하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파진다. 하지만 잘 부신 그릇을 시렁 위에 피라미드처럼 차곡차곡 쌓아놓고 그것을 바라보노라면 흐뭇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설거지를 한 해 내내 하는 사람도 많은데 어쩌다 한 번 하는 것으로 생색내기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라도 해야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나 싶다. 2015.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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