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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상종할 수 없는 최악질 꼴통 기자'의 재판 지침서

by 이우기, yiwoogi 2015. 1. 30.

어릴 적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법원, 경찰서, 병원이다.” 맞는 말씀이다. 법조인이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경찰 공무원이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의사가 되지 말라는 말도 당연히 아니다. 죄지어 재판 받으러 가는 일 없어야 한다는 말이고 역시 죄지어 유치장에 갇히는 일 없어야 한다는 말이고 몸이 아파 드러눕는 일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앞의 둘은 지켜온 것 같다. 병원은 몇 번 입원한 적이 있으니 지키지 못한 것 같다. 사람은 병원은 한번 이상은 가게 된다.

 

<주기자의 사법활극>은 누구든 언제든 소송에 휘말려 피의자가 되어 검찰이나 경찰의 부름을 받을 때부터 재판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법적 지식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책이 엄청나게 재미있다. 책을 꽤 느리게 읽는 나도 너덧 시간 만에 완주했다. 딱 와 닿는 표현이 많아 밑줄도 제법 그었다. ‘, 그랬구나!’하는 순간도 많았다. 역사적 고비가 되었던 많은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의 검사와 판사, 그리고 변호사는 누구였는지, 정권에 아부한 누구누구가 그 뒤 어디로 영전했는지 따위 우리가 잘 몰랐던 정보도 알려준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재미있어서 분노도 커진다.

 

<시사IN> 주진우 기자는 18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던 201212월 박근혜 대통령(당시엔 후보)5촌 살인 사건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의혹을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씨가 민형사 소송을 걸었다. 이 책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이어진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을 따라가면서 처음 소송을 당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히 일러준다. 주진우 기자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대략 83건의 소송을 당했다. 대부분 이겼고 일부 진 사건도 있다. 모두 기사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주진우 기자는 자칭 소송 전문기자이고 몸값이 가장 비싼 기자이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상종할 수 없는 최악질 꼴통 기자라고 부르는가 보다.

 

그의 소송안내는 친절하고 솔직하다. 이런 책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가장 친절하고 자세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법학자나 판사, 검사, 변호사를 지낸 사람이 쓰는 책보다 피의자 또는 참고인의 신분이 될 위험성이 높은 사람 처지에 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더욱 와 닿는다. 우리나라 법이라는 것과 검찰, 법원에 대한 그의 시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하도 여러 번 당하다 보니 그들의 속성과 근성과 몰염치함과 낯 두꺼움을 속속들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게으르거나 무능력하거나 나쁜 일부 변호사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믿고 기댈 언덕은 역시 변호사밖에 없다는 사실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주진우의 경험을 우리가 좀 가져가 본다면 이렇다. “(검찰이나 경찰에서 나오라는) 전화벨이 울리면 반드시 변호사에게 달려가라.”(48) “일단 검찰이 칼자루를 쥐었기 때문에 검사나 수사관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66) “증거 있는 놈이 이긴다. 법정에서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은 증거다.”(69) “재판은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로 진행된다. 재판은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 정의로운지 아닌지,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게 아니다. 사안에 대해 법률적으로 타당한지, 입증 가능한지를 따지는 거다.”(89) “변호사의 스토리와 검찰의 스토리 중 어떤 게 더 믿을 만한지 다투는 과정이 곧 재판이다.”(90) “똑똑한 사람이 오히려 함정에 더 쉽게 빠진다.”(90) “형사재판은 내 말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검사의 논리에 구멍을 내는 싸움이다.”(102) “검사는 절대 봐주려고 먼저 제안하지 않는다.”(133) “판사는 내가 마지막으로 호소할 사람이다.”(212) “재판은 연극이다. 예행연습을 하고 최종 점검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237) “대다수 사람들은 판사가 사건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거라 믿는다. 진실을 밝혀줄 거라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261) “없는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보다 돈 물어주는 것이 훨씬 무섭다. 이런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보면 오히려 겁이 없는 것 같다. 하늘이 안 무서운가 보다.”(266) “판사는 협소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유념해야 한다.”(270) “판사들은 세상에 판사와 그 밖의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검사들은 세상에 판검사와 그 밖의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283)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쟁취하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룰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324) “참사가 일어나 아이가 죽으면 어머니가 대통령에게 빌어야 하는 세상 아닌가? 진실은 가족이 밝혀야 하는 세상 아닌가? 법이 진실을 막는 세상 아닌가?”(324)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기자의 소임이다.”(326)

 

그가 기자라는 사실은 좀더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나는 기자다, 그래서 싸운다고 말한다. 주진우의 글을 읽다보면, 기자가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의혹을 제기하다 보면 이런저런 소송에 휩싸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정하고 사기꾼의 길을 걷는 사람이거나, 어쩔 수 없이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를 내는 가련한 중소기업 사장이 아니라면, 법정에 설 위험성이 가장 큰 직업군 중 하나가 기자 아닐까. 그런데도 무탈하게’ ‘대과 없이기자생활을 마쳤다는 건 자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다못해 언론중재위원회에라도 몇 번 들락거릴 정도는 되어야 정말 제대로 기자생활을 했다고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자가 그렇게 덜 떨어지게 취재하고 보도했다는 게 아니다. 하도 상식과 비상식이 뒤엉켜 있고 정의와 불의가 뒤집혀 있고 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에 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주진우의 사법활극>을 읽다 보면, 우리 사회에 과연 양심과 상식과 정의와 법이라는 게 있기나 한지 궁금해진다. 재미있게 읽고 나서 서글퍼진다. 이 사람의 책은 늘 그렇다.

 

 2015.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