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단에 포함되어 있으면 잘 모른다. 집단을 이루고 있는 동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물어봐도 말해주지 않거나 말해준다 한들 진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서 물어 보나마나다. 가족끼리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주어진 의무나 도덕률을 자기의 진심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형제끼리 우애롭게 지낸다고는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와 부모라는 무시무시한 감시 때문에 짐짓 우애로운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열 살 남짓 되던 해 가을이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여서 어머니, 아버지는 늘 해가 진 뒤 깜깜해져서야 돌아오곤 했다. 오후 서너 시쯤 귀가하던 나는 아무렇게나 담겨 있는 설거지, 저녁 밥 안치기, 소여물 끓이기 같은 일을 했다. 혼자서 한 건 아니다. 아들이 넷이나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혼자 집에 있게 되었다. 날마다 하는 일이지만 혼자서는 처음이어서 많이 긴장되었다. 학교 숙제도 그날따라 많았다.
밥을 안쳐놓고 숙제를 하다가 깜빡 졸았다. 연탄 화로 위 밥솥은 밥물이 끓어 넘치다가 기어이 밥이 타고 말았다. 밥솥 타는 냄새와 쌀 타는 냄새가 저녁안개에 섞였다. 흙냄새 풍기며 돌아와 서둘러 저녁밥을 먹은 뒤 주무셔야 하는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까운 쌀을 버린 것도 그렇고, 다시 밥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뭣 하느라 밥을 태웠느냐?”며 따져 물을 때 내 궁색한 대답이 무서웠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산으로 집을 나섰다.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을까.
해는 뉘엿뉘엿 넘어갔지만 완전히 깜깜하려면 두어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뒷산을 타고 넘어 밭둑을 거닐다가 다시 동네로 잠입하여 남의 집 담벼락 곁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뻔하디 뻔한 동네에서도 그렇게 얼마든지 정처 없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윽고 사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배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머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어린놈이 갈 데가 있었겠나. 고양이걸음으로 집 근처에 다다랐다. 마루에서는 내가 없는 우리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가족이 모여 있는 풍경화의 안쪽을 바깥쪽에 서서 처음으로 관조하는 순간이었다.
“배가 고플 낀데, 오데로 갔을꼬?” “어두운데 무섭지도 않나?” “이놈의 자슥, 그것 갖고 집을 나가? 아이고 오데다 써 묵겠노?” “잘못했다 빌면 되지.” “된장찌개 잘 먹는데 좀 남겨 놔라.” “그래, 맞다. 이놈이 좋아하는 반찬이 이리 쌨건만.” “나무라지 마이소. 평소 때 잘했다 아입니꺼?” “누가 뭐라 한다 했나?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지.”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들어오면 다리를 뿐질러 버릴 끼다.”라는 말을 들어도 끽소리 못할 처지였는데….
늘상 같이 일어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학교 가고 같이 잠자고 할 때는 형제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몰랐다. 아버지, 어머니도 뭐든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꾸지람할 줄로만 알았지,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없을 때, 더군다나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실수라기보다)을 저지른 뒤 도망간 역적에게 가차 없는 악담이 화살처럼 쏟아질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본 우리 집 안 풍경은 걱정과 우려로 가득했고 배려와 위로로 넘쳤다. ‘가족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기 머쓱하여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밭은기침만 나왔다. 큰형이 “무슨 소리 안 났나?”라고 했고 아버지는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퍼뜩 와서 밥 안 먹고 뭐하노?” 소리를 질렀다. 울면서 마루로 올라섰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담아 주었다. 된장찌개며 갈치구이 같은 반찬이 거의 그대로 남았다. 또 울었다. 만약 부모든 형제든 한 명이라도 “이 나쁜 새끼, 어데 가서 뒤져버려라.”라거나 그 비슷한 말을 했더라면, 그 길로 정말 멀리 달아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내 인생은 얼마나 파란만장하고 그 기항지와 도착지는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문득 생각나는 날이다. 2015.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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