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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야생동물 주의 구간

by 이우기, yiwoogi 2014. 12. 15.

제 주인이 어떠한 벌금이나 범칙금, 과태료도 안 내도록 하는 게 타고난 운명이자 책임인 이 여성은 친절하고 자세하고 꼼꼼하고 상냥하기로는 우리나라 1등이다. 목소리 좋기로는 아나운서 뺨친다. 수고비를 많이 달라고 하지도 않고 근무시간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일도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정말 잘한다. 칭찬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딱 두 가지의 경우만 빼고...

 

내비게이션 이야기다. 이 친절한 여성은, 그래, 아가씨라고 할까, 이 아가씨는 저의 주인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나 않는지 노심초사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길을 잘못 들어 10분 만에 갈 길을 11분이나 걸리지 않는지 세심한 배려를 한다. 잠시잠깐 졸거나 한눈팔거나 강림하는 지름신을 접신하는 일도 없다. 이 아가씨는 입에 침이 마르는 일도 없고 두통이나 치통, 생리통 같은 것도 앓지 않는 건강 체질이다. 사시사철 한결같이 주인과 함께 일어나고 주인과 함께 잠자며 주인의 안녕을 기원한다.

 

두 가지 경우란 무엇인가. 주인은 고속도로나 국도를 운전할 때 야생동물 주의 구간입니다. 조심운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이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으면 당혹스러워진다. 그래, 야생동물이 도로 위로 뛰어 들어오는 경우가, 그리 잦지는 않지만,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니 조심해야겠지. 그런데,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 거야? 천천히 갈까. 그러다가 마침 그때 노루나 토끼가 뛰어 들어오면? 휙 빨리 지나가 버릴까. 그러다 마침 그때 고라니나 오소리가 뛰어 들어오면? 어쩌란 말이야!

 

다음의 경우는 낙석 주의 구간이다. 벼랑 위에서 돌이 떨어진다는 말이겠지. 돌은 언제 떨어질까. 그걸 알 리가 있나. 전방에 낙석주의라는 안내 표지판이 나오고 내비게이션의 이 예쁜 목소리의 아가씨가 조심하라고 알려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나 큰 돌이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니 차를 갓길에 세워 놓고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을까. 아니면 돌이 떨어지기 전에 휙 지나가 버릴까. 마침 그때 커다란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안개지역을 만나면 무조건 천천히 운전하면 된다. 안개등과 비상등을 켜면 좋겠지. 굽잇길(크브길)을 만나면 무조건 속도를 늦춰야 한다, 오래 살려면. 다리(교량)를 만나면 역시 천천히 운전하는 게 상수다. 습기나 얼음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미끄러운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강풍주의라는 표지판을 봐도 역시 천천히 가야 한다. 도로가 좁아지거나 넓어지거나 할 때도 대부분 천천히 운전하면 된다. 속도위반 차량 단속 카메라가 있을 때도, 너무나 당연히, ‘천천히아닌가. 우리의 영민한 이 아가씨는 그런 것을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야생동물 주의 구간이나 낙석 주의 구간을 지날 때는,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엑셀을 확 밟아 빨리 지나가 버림으로써 사고는 남의 일이 되도록 미뤄버릴 것인가, 아니면 최대한 천천히 운전하여 내 앞에 발생하는 사고의 목격자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 늘 마음은 설레고 가슴은 두근거린다.

 

이러한 설렘과 아슬아슬함, 그리고 가슴 쫄깃쫄깃함을 내비게이션 아가씨와 운전자에게 미뤄두고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도로공사나 국도 담당 공무원 선생님들이다. 야생동물이 나올 만한 곳이나 바위가 떨어질 것으로 보이는 위험지역은 미리미리 안전하도록 뭔가 더 조치를 해줘야 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세심하고 부드러운 우리 아가씨에게 짜증내고 신경질 내고 화내는 주인이고 싶지는 않다. 나만 그런가?

 

2014.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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