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젖히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7년 10월 20일(음력)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 안간리 숲골마을입니다. 1979년 진주로 이사와서 봉래동ㆍ수정동ㆍ장대동을 이사다녔습니다. 안간초등, 봉래초등, 진주중, 대아고, 경상대를 졸업한 뒤 경남일보에서 11년, 뉴시스에서 6개월 일했고, 2004년 3월부터 지금까지 11년 가량 경상대 홍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998년 6월 14일 결혼하여 중학교 2학년 아들 하나 두었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남자는 길을 나설 때 우산 하나와 거짓말 하나를 갖고 다녀야 한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병(丙)자 직(直) 자를 쓰시는데, 가끔 “내 이름에 직은 곧을 직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길 나설 때 거짓말 하나와 우산 하나를 들고 다니지 못했으며 곧게 살아오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참, 요새는 어깨에 메고 다니는 가방에 작은 우산 하나 넣어 다닙니다. 머리에 비 맞으면 좀 그러니까요.
초등학교 때 찍힌 사진을 보면, 반바지에 허리띠를 매고 다시 그 위에 긴바지에 허리띠를 매어 이중으로 허리띠를 매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참 바보 같은 놈이었을 겁니다. 구구단을 외워야 학교를 마치는데, 5×7은 35라 해놓고 7×5를 답하지 못해 마지막까지 남아 벌청소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진주로 전학을 와서는 공부는 더욱 못했고 친구들 사귈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는 두 곳을 다녔는데 정말 마음 둘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아예 뒤로 빠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회색인간이었을 겁니다. 그건 딱히 전략이랄 것도 없이 그저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졸업할 때 평균 평점은 3.7이었으니 공부로써 인생의 승부를 걸기도 글렀고 그렇다고 무슨 기술을 배우거나 할 만한 처지도 못 되었지요. 군대 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찌 하다 보니 몸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있도록 하기 위한 어떤 운명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선배도 많고 사랑하는 후배도 많습니다. 물론 그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는다면 우리 가족보다 더 소중한 인연은 없겠지요. 힘들 때 같이 술 마시며 위로해준 분들, 즐거울 때 함께 즐겁게 웃어준 분들, 외로울 때 말벗이 되어준 분들, 세상모르고 설치려고 할 때 가만히 손잡으면서 지긋이 눌러준 분들, 의기소침해 있을 때 어깨 두드려준 분들, 갈 길도 모르고 돌아갈 길도 잊어버렸을 때 촛불 밝혀준 분들...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오늘, 내일은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야겠습니다. 험한 세상 건너가기에 지혜가 턱없이 모자란 나를 믿고 살고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도 감사해야겠네요.
201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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