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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조용헌의 명문가>를 읽으며 ‘대한항공’을 생각한다

by 이우기, yiwoogi 2014. 12. 18.

대한항공 때문에 말이 많다. 나는, 남에게 말하긴 참 부끄럽고, 일을 저지른 이를 보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모론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닌데, 더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 생기면 덜 부끄러운 일을 침소봉대하여 여론을 딴 데로 몰아버리는 일을 더러 저질러 온 그들의 과거를 돌아본다. 그러던 중 <조용헌의 명문가>를 읽었다. 조용헌은 박학다식하고 이야기를 재미있고 진지하게 잘한다. 역사공부도 되고 마음공부도 된다.

 

책에서는 논산의 명재 윤증 고택’, ‘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 대종택, 서백당’, ‘전남 담양군 창평면 고씨 집안’, ‘우당 이회영과 형제의 일가’, ‘인동장씨의 수재 집안’, ‘정읍 평사리 강진김씨 고택’, ‘안동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고택, 필경재’, ‘간송 전형필과 간송 집안을 다루고 있다. 모두 대단한 명문가이다. 다 소개할 겨를도 없고 그러려고 읽은 게 아니어서 따로 적바림을 하거나 밑줄을 긋지도 않았다. 대한항공 말이 나왔으니 한 명문가만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대한항공은 요즘 하도 입도마에 올라서 그렇지 우리나라 재벌들 하는 행태를 보면 대한항공과 얼마나 다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우당 이회영 집안은 조선시대 서울을 대표하는 소론 명문가였다. 영의정을 10명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 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일 뿐만 아니라 당시 재산도 3만 석이나 되던 부자였다. 구한말에 나라가 망하자 이 집안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3만 석 재산을 팔아 전 가족이 마차에 몸을 싣고 북풍한설을 뚫고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인 청산리 전투의 정예 요원들은 우당 집안이 내놓은 전 재산을 기반으로 해서 길러진 인재들이었다.

 

백사 이항복 이래로 배출된 재상이 10명이었다.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사명감과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하여 합방이 이루어지자 우당은 6형제가 모인 자리에서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을 밝힌다. 형제는 한 명도 반대하지 않고 모두 그 자리에서 동의한다. 여섯 형제는 가산을 처분한다. 당시 화폐로 환산하면 40만 냥이었는데, 요즘 돈으로는 600억 원 정도라고 한다. 그해 12월 혹한의 추위 속에 망명길에 오르는 우당의 가족들을 떠올려 보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들은 조선 왕조에서 10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집안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가 망했다는 이유로 부귀영화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리타향 만주로 떠나는 조선 최고의 귀족 집안... 지금 세상에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일제에 협력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일본인이 되고자 한 수많은 양반들과 고관대작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온갖 핑계를 대어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의 귀족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은 해방 이후 우익인사가 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반공투사가 되었으며 유신정권 때는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되어 역사의 양지만 찾아다니며 권력과 경제력을 거머쥐었다. 권력에 아부하며 정경유착으로 기업을 살찌우고 세금포탈과 밀수로 덩치를 키워온 재벌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늦게나마 스스로 반성하여 번 만큼, 쥔 만큼 베풀면서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것 아닌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국민과 함께 역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아니었는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재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 양 안하무인과 몰염치, 부도덕의 극치를 보여주기만 했다. 그들의 오늘이 있게 한 노동자의 피와 땀, 국민들의 성원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쇠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귀찮다. 대한항공 사건은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게 돼 있다. 잘못을 진실로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도구로 보일 뿐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마비된 의식은 역사와 겨레 앞에 대역죄를 저지르게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지금은 우당 이회영처럼 가산을 처분하고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우당 이회영처럼 귀족이라면 귀족으로서 피해서는 안 될 의무, 책임, 사명 같은 게 있다. 그것은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고 노동을 신성하게 바라보며 더불어 사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을 생활화하고 인도주의를 실현하며 베풂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러리라고 별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대한항공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닌가.

 

2014.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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