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몰랐다. 어머니는 마흔 살 언저리쯤부터 치통을 심하게 앓으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틀니를 하고 계신다. 위아래 이를 하나하나 스스로 뺄 때의 고통을 우리는 알 리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열두엇 무렵이었으니까. 요즘은 시내에서 고개만 돌리면 치과가 있고 버스 한 정거장마다 병원이 있을 정도이지만, 당시 우리 집은 두 시간쯤 기다려야 한 대가 오는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한 시간은 더 가야 시내에 닿을락말락한 곳에 있었다. 시내에 당도한다 하더라도 치과가 흔하지 않을뿐더러 돈도 마련되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밤새도록 퉁퉁 부은 턱을 부여잡고 끙끙거리시던 어머니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아주까리 열매를 따서 부엌으로 가셨다. 계절이 달라도 아주까리는 집안 어디엔가 늘 있었다. 아침밥 끓인 솥단지 밑에 남은 숯불을 꺼내놓고서는 긴 바늘에 끼운 아주까리를 구웠다. 아주까리가 얼마간 달구어졌을 즈음. 그것을 아픈 이에다 갖다 대고서는 윗니 아랫니를 꽉 깨물었다. 원래 있던 치통이 지랄발광을 하는 건지 뜨거운 아주까리가 이와 잇몸을 지지는 건지 알 수 없는 극한의 통증 속에서 혼절하다시피 한 끝에, 잠시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얻으시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 하나하나를 다스려 나갔다. 아주까리는 치과의사보다 뛰어난 의사였고 그 어떤 치료제보다 효과가 탁월한 치통 약이었다. 우리는 잘 몰랐다. 그것이 어머니의 이와 잇몸을 어떻게 얼마나 망가뜨리는지에 대해 알 길이 없었고 단지 잠시나마 평화로워 보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다행스럽게 여기곤 했었다.
치과를 다니기 시작한 지 몇 해는 되었다. 이십대 말 오른쪽 어금니 하나를 금으로 둘러씌운 뒤 거의 20년 가까이 그냥저냥 버텨왔다. 스케일링이라는 것도 생각지 않았고 언감생심 정기검진 같은 것도 남의 일인 양 여겼다. 거울에 비친 이 사이에 세균 덩어리가 뻔히 보이는데도 당장 아프지 않으니까 견디고 버티고 심지어 모른 척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3~4년 전부터 치과라는 데를 가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나를 버리고 도망간 이가 위아래 오른쪽 왼쪽 합하여 몇 개나 되고, 오늘은 기어이 아래 앞니를 ‘보철’로 덮어 씌웠다. 그 동안 이 아픈 고통으로 뒤척인 밤이 몇 번이랴.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것은 언제 적 일인지. 차가운 물을 조금만 마셔도 진저리를 칠 만큼 잇몸이 시린 적은 또 몇 번이던가.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치과를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식하고 한심하고 바보스러운 짓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말은 잘했다. 이 아픈 것은 견디면 견딜수록 고통만 더해갈 뿐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고, 견디면 견딜수록 더 큰돈이 들게 되어 있다고…. 사실 이런 말은 어머니의 아주까리 치료법을 보면서 느낀 것인데, 말은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하면서도 바쁘다는 핑계와 당장은 아프지 않고 견딜 만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허송세월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아주까리를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일까.
주약동 옛 철길을 다듬어 만든 자전거길 가에 맺혀 있는 아주까리 열매를 보고 문득 자전거를 멈추었다. 아직 열매를 껴안고 있는 초록빛 아주까리는 이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사람의 잇몸처럼 보였다. 그 속에는 잉걸불에 달구어져 어머니 이를 뜨겁게 달구어주곤 하던 아주까리 열매가 가을햇살을 뜨겁게 뜨겁게 받으며 여물어가고 있을 것 아닌가. 아주까리만 보면 어머니 틀니가 생각난다. 빛깔은 비록 다르지만 모양은 사람 이를 닮은 아주까리 열매를 보면, 이의 소중함과 그 소중한 것을 하나하나 스스로 뽑던 어머니의 젊은 날의 지독하게 무섭던 그 고통이 생각난다. 2014.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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