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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부끄러움

by 이우기, yiwoogi 2014. 10. 28.

 

 

 

 

부끄럼 많던 시절이 있다.

국민학교 6학년 3월 초 안간에서 진주로 이사하면서 전학하였는데, 처음 등교한 날 국어 쪽지시험을 봤다. 안간국민학교에서는 6학년 과정을 단 1시간도 배우지 않고 전학 왔는데, 봉래국민학교 6학년 2반 교실에서는 시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보기 좋게 낙제점수를 받았고, 선생님은 너 임마, 촌 학교에서는 반에서 1, 2등 했다더니 이게 뭐냐? 촌놈, 정신 안 차릴래?”라고 하셨다. 심하게 부끄러웠다. 그냥 정신 차려 공부해라.”고만 했던들 그렇게 부끄럽진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2반 짝지 아버지는 공군 준위였다. 준위라는 계급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참 애매한 것이란 사실을 스무 살 넘어 군대 가서 알았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 하며 사는지 통 모르겠다. 아무튼 나를 엄청 괴롭혔다. 공사장 노가다, 연탄보일러 수리공이던 아버지, 당숙 따라 강원도로 해남으로 배추 캐러 다니던 노동자로 계급장 없는 아버지의 아들인 나는, 과외로 한 달에 수십만 원씩 쓰는 그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이기고 지고 하는 싸움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래서 늘 짝지에게 밀리고 주눅들고 부끄러웠다. 그는 나를 어이, 촌놈!”이라고 불렀고 사사건건 시비조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학을 시켜달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

고등학교 공부는 힘들었다. 삼 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생각해 보면 기적 같기만 하다.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졸업을 할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한 적도 많고, ‘대학이라는 데를 갈 수 있기는 할까.’ 걱정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점심시간에 맨 앞에 앉았던 나는 뒤로 돌아앉아 친구와 마주보며 달걀구이와 소시지와 잔멸치볶음 같은 고급 반찬을 나눠 먹었다. 내 도시락 반찬에도 멸치는 있었지만 그 멸치는 대가리도 달려 있고 턱밑 똥도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러웠지만 견딜 만했다. ‘뭐 어때서?’ 이런 생각을 조금은 했던 것일까. 힘들지만 즐겁게 어렵지만 유쾌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얼굴은 핼쑥해지고 엉덩잇살도 해졌지만 견뎌낸 것이 스스로 대견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촌놈이란 말은 안 듣고 살았는데, 열대여섯 살쯤 된 놈들이 나름대로 철이 들었던 것이었을까.

세상을 살면서 부끄러운 적이 어디 한두 번일까. 세상 물정을 좀 알게 되면서 나는 학창 시절에 겪은 부끄러움은 명함도 못 내밀게 부끄러운 일을 많이 알게 되고, 배우고, 겪는다. 직접 저지르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일도 보고 겪고, 조직과 조직 사이에 저질러서는 안 되는 윤리가 무너지는 것도 목격한다. 다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런 시절을 아슬아슬하게 건너왔다. 그래서 덜 부끄럽고자 했고, 남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살려고 했다. 쉽지 않았다. 그러려고 노력했다는 것 자체로 위안 삼았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라며 자위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 자체가 부끄러울 뿐이다.

공맹(孔孟)을 불러오지 않고도, 인류 사대 성인을 모셔오지 않아도, 우리는 염치를 알고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가 무너지고 부끄러움이 실종한 사회는 짐승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르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본다. 촌놈이라 무시하지 말고, 권세 없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여자라 장애인이라 다문화가족이라 노동자라 농민이라 말단이라 비정규직이라 계약직이라 못생겼다 어리다 늙었다 깔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격을 존중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부끄럽다. 열두세 살 적 개인적 부끄러움은 지금은 사회적 부끄러움으로 성장했다. 부끄러움도 성장하고 발전한다. 지금 이 시절에도 하늘 보기는 여전히 부끄럽다. 201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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