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다. 그냥 정처 없이 떠나고 싶다. 바닷가로든, 산 속으로든. 발길 닿는 데로 마음 가는 데로 무작정 떠나고 싶다. 가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가을 꽃 있으면 눈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고, 또 가다가 철 지난 고구마 밭이라도 있으면 한 뿌리 쑥 빼어 베어 먹어도 보고, 또 가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홍시 있으면 살며시 주워 먹어도 보며 그렇게 방랑을 해보고 싶다. 허름한 밥집 있으면 불쑥 들어가 주인 불러 막걸리 타령도 해보고, 반듯한 민박집 있으면 하룻밤 방값 흥정도 해보고, 그렇게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떠나고 싶다. 그냥 지갑 하나 들고 아무 버스에나 올라 맨 뒷자리에 앉아 끝까지 가보고 싶다. 낯선 곳에 내려 두리번거리며 한 번쯤 ET가 되어 보고 싶다. 있을 리 없는 아는 사람을 기다리는 척하며, 가게 안 시계도 보고 먹지도 않을 차림표를 훑어보며 시장기를 견뎌보고 싶다. 그러다가 버스가 오면 또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고 올라타서 뒤로 달려가는 풍경들을 느껴보고 싶다. 문득 생각난 듯,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마음의 사진기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보고 싶다. 그렇게 찍힌 질박한 인생들의 속살에 얼굴을 비벼보고 싶다.
떠나고 싶다. 전화기는 집에서 혼자 울게 내버려 두고 신문은 대문 앞에 쌓이든 말든 라디오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는 데를 한 며칠간만 돌아다니고 싶다. 며칠 머리 안 감아도 부끄럽지 않고, 목욕 안 해도 안 죽고, 면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은 삶 안에 안겨 보고 싶다. 발 냄새 좀 나고 입 냄새 많이 나고 땀내에 절어도, 마음 하나 잘 간직하면 앞도 보이고 뒤도 보이는 길 위에 서 있고 싶다. 스쳐가는 사람에게 오랜 지기처럼 다정하게 인사도 하고, 힘겹게 수레 끌고 가는 노파를 만나면 말없이 끝까지 밀어주고 싶다.
빨갛게 물들고 노랗게 채색된 길을 걸으며 억새에게 말 걸어 보고, 도시 골목길 귀퉁이에서 쓰레기통 뒤지는 고양이를 만나 물끄러미 한참 동안 바라봐 주고 싶다. 가을비 내리면 모르는 집 대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비긋기를 하거나 그냥 비 맞으며 철벅철벅 거닐어 보고 싶다. 이윽고 밤이 오면 대폿집에서 소주 한 잔 걸치고 ‘나그네 설움’ 웅얼거리며 젓가락 장단이라도 두드려 보고 싶다. 그러다 밤 깊으면 취한 몸 역 대합실에 뉘어 놓고 밤기차 기다리는 연인들의 구경거리라도 되어주고 싶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인생의 쓸쓸함이 얼굴에서 좀 사라질까. 삶의 고달픔이 어깨에서 좀 내려질까. 이념의 덧없음이 가슴에서 좀 스러질까. 규칙이란 것의 부질없음이 눈에서 좀 희미해질까. 계획이란 것의 허무함이 마음에서 달아날까. 경쟁이란 것의 무모함이 머리에서 좀 없어져 줄까. 그렇게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사랑이란 것의 달콤함을 좀더 깊이 알게 될까. 그리움이란 것의 아련함을 좀더 넓게 느끼게 될까. 가을이란 것의, 이 해괴하고도 오묘한 자연의 오지랖 앞에서 한없이 짜부라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기나 할까. 2014.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