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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퍼나른 글 모음

밤이 선생이다

by 이우기, yiwoogi 2014. 10. 21.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는다. 책 표지 왼쪽 아래에 조그맣고 까만 글씨로 ‘천년/전부터/당신에게......’라고 적혀 있다. 천 년 전부터 이미 밤이 우리에게 선생이더라는 말이다. <진주문고>에 가서 책 이름을 들먹이자 1초도 안 돼 집어 준다. 돈 받는 데 바로 앞에 몇 권 쌓여 있었다. 요즘 꽤 잘 나가는 책인가 보다.

‘책을 펴내며’에 이렇게 써놓았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산문 정신’을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제1부에 담아 놓은 39편을 읽었다. 대개 신문 칼럼이었던 듯 정갈하고 깔끔하다. 길지도 않아 금방금방 책장이 넘어간다. 말은 가지런하고 문장은 탄탄하며 낱말은 풍성하여, 읽는 재미가 넘친다. 그 속에 우리가 살아온 시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도정일을 읽은 뒤 이런 기분은 처음인 듯하다. 넓고 깊이 공감하여 크고 높게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런 글이 많다.

대학 교수인지라, 대학과 관련 있는 생각을 펼쳐놓은 곳도 있다. 가령 ‘영어 강의와 언어 통제’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 부록으로 딸린 ‘신어의 원리’에 대해 언급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요즘 거의 모든 대학들이 앞다투어 실행하고 있는 영어 강의에 대해서도 같은 염려를 하게 된다. 나는 우리의 여러 대학에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영어로 강의할 능력을 지닌 교수들이 모자라지 않으며, 그 장점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정한 교과 내용을 배우면서 영어도 함께 익히니 도랑 치고 가재 잡기가 따로 없다. 외국어 강의는 교안을 면밀하게 짜야 하니 수업 진행에 차질이 없고, 강의가 옆길로 새나가기 어려우니 아까운 시간이 허비되지 않을 것이다. 강의가 한국어에서 벗어나니 외국 학생들을 불러오기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 강의의 이 모든 장점은 그 약점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작은 수의 어휘만을 사용하여 교안에 충실하게 진행되는 외국어 강의는 학생들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옆길로 새나갈 수 없는 강의는 삶과 공부를 연결해주는 온갖 길들을 차단할 것이다. 언어의 깊이가 주는 정서를 학문의 습득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탐구는 모든 지식을 도구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 강의가 사상 통제를 위해 실행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상 통제의 필수조건인 언어 통제가 그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126~127쪽)

<1984>에서 신어의 원리는 허구의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나라의 언어정책에 관해 말한다. 신어는 그 나라의 공용어이며, 그 창안 목적은 그 체계에 걸맞은 세계관과 사고 습성을 표현하고, 그 국가 이념 이외의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 언어에는 낱말 하나하나가 단 하나의 뜻만 갖는다. (...) 품사의 구별이 없는 이 언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문장이 없고 개념의 나열이 있을 뿐이다. 문장이 없으니 논쟁이 없고,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으로 연결될 일이 없으니, 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발전할 일도 없다. 국가가 제시하는 정통 사상이 아닌 다른 생각은 표현될 길이 없을뿐더러 아예 탄생하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이렇게 언어가 통제되고 사상이 통제된다. (126쪽)



201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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