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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퍼나른 글 모음

일요일

by 이우기, yiwoogi 2014. 10. 9.

5시 50분에 잠에서 깼다. 악몽을 꿨다. 싫어하는 정치인이 나에게 계속 뭔가를 강의했다. 강의를 빙자한 세뇌였다. 나는 종치는 소리를 기다렸다. 그러자 그건 그냥 고등학교 교실이었고, 정치인은 선생님으로 변해 있었다. 드디어 종이 울렸다. 5시 50분에 맞춰져 있는 내 몸 알람이 때맞춰 나를 구해준 것이다. 화장실 갔다 와서 다시 잤다. 다행히 꿈은 이어지지 않았다.

7시 30분쯤 다시 잠에서 깬다. 출근을 서두를 시간이다. 아, 오늘은 일요일이지. 그러면 누군가 나를 찾을 때까지, 또는 스스로 몸이 일어날 때까지 자면 되겠다. 그런데 배가 고프네. 에잇, 배고프면 잠도 못 자는데... 부스스 일어나 주방을 기웃거린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제 본가에서 가져온 장어국이 보이고 어제 먹다 만 반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무질서한 냉장고 속을 보니 뱃속이 질서정연해져 마침내 배가 더 고프다. 할 수 없다.

밤 깊도록 <인간의 조건> 보고 또 그뒤 다른 프로그램까지 섭렵하고 큰방에서 잤을 아내와 아들은 일요일엔 안 깨우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아들 방에서 일찌감치 잤으므로 거의 정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대개 주말에 어딜 가려면, 이 방 저 방 문을 활짝 열고 창문을 열어젖히며 고함을 질러 깨우지만, 지난 주말 10명 넘는 처가 식구들 맞이하고 평소의 몇 십 배를 걷고 섰던 고단함을 생각하며 그냥 내버려 둔다.(아내는 토요일 오후부터 밤까지 강변에서 열린 청소년 무슨 대회 일꾼으로 하루 종일 고생하고 어젠 집 치우느라 또 고생했다.)

장어국을 냄비에 옮겨 끓인다. 밥을 푼다. 김치와 젓갈과 도토리묵 같은 것을 꺼내 밥상을 차려 혼자 거실에서 숟갈을 든다. 어쩔 수 없이 스며들게 마련인 쓸쓸함을 달래려고 스마트폰으로 <퀴즈 사총사>를 보면서 아침을 때운다. 단단한 밥알이 다시 논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부실한 이빨들을 천천히 부지런히 놀린다. 역시 대규모 손님 치른 뒤의 불가피한 뒤처리이다. 이틀 만에 면도하고 머리감고 스킨을 바르니 얼굴이 아주 조금 따끔따끔한 게 상쾌하게 느껴진다.

거실에 얌전히 놓인 새로 산 컴퓨터를 켜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해 본다. <페이스북>을 보다가 누군가 산울림의 <그래 걷자>를 연결해 놓은 것에 필이 꽂혀 <유튜브>로 찾아가 아예 <산울림 히트곡 모음>을 듣는다. 가을스럽다. 경쾌한 노래도 느릿느릿한 노래도 꼭 이 계절, 이 아침에 맞는 노래 같다. 마음이 서서히 움직인다.

자, 식구들을 깨워 밥을 먹게 한 뒤 어디로든 떠날 것인가. 떠난다면 유등축제로 갈 것인가, 코스모스 축제로 갈 것인가, 동피랑마을로 갈 것인가, 지리산 계곡으로 갈 것인가, 이름도 못 들어본 어느 절 암자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나는 이제 배부르고 모자란 게 없으니 다시 아들 방에 처박혀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최소한 오전만이라도 푹 잘 것인가.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너의 의미> 이런 노래 들으며 갑갑한 교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싫은 정치인이 내뱉는 강의 세뇌를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사흘 연휴 끝 일요일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러고 있노라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는군...


2014.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