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 진주로 이사 왔다. 어머니는, 중간상인이 농촌에서 사온 배추, 무 따위 채소를 공판장에서 경매로 중개인에게 넘기면, 그것을 다시 떼서 파는 소매상이었다. 손수레에 배추 100포기를 싣고 옛 국일약국에서 지금의 국민은행 방향으로, 지금의 공영주차장 쪽에서 영채내과 방향으로 오고가며 장을 보러 온 아줌마들에게 배추를 팔았다. 한 포기 팔면 몇 십 원이나 남았을까. 운 좋으면 많은 김치를 담가야 하는 식당 주인을 만나 망경동, 상봉동으로, 심지어 뒤벼리를 지나 상대동으로 배달가곤 했다. 가는 길, 오는 길은 힘들었지만 수십 포기를 한 번에 팔기도 했고 100포기를 통째 팔기도 했다. 추위도, 더위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 날 어머니의 귀가는 즐겁고 일렀다. 손수레는 당시 우리 가계를 이끌어가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중학교를 다녀온 내가 전기밥솥에 쌀을 안쳐 놓으면 술 취한 아버지와 고단한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화목한 시기는 아니었다. 가난은 늘 부부싸움의 원인이었고 우리들의 학비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어쨌든 중앙시장은 그 시절 우리가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은혜로운 터전이다.
닭집이 있었다. 지금의 ‘송강식당’처럼 다락이 있던 닭집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대학 시절 우리는 그 다락에 올라앉아 25도짜리 무학소주를 들이켜며 시시덕거렸고 때론 격론을 벌였다. 화장실이 멀기도 하려니와 계단 오르내리기 힘들고 귀찮아 술병에다 쉬를 누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 먹던 닭국은 최고급 안주였다. 알탕 집도 그때 드나들던 곳 가운데 하나다. 닭집은 죄다 없어졌지만, ‘송강식당’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주는 몇 안 되는 추억의 명소가 되어 현재도 성업 중이다. ‘대호김밥’, ‘나리분식’ 같은 이름도 마음에 남아있다. 청춘 남녀 짝짝이 나란히 앉아 김밥 먹고 단무지 씹으며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던 곳이다. 모꼬지 가는 날 주문해 놓은 김밥 찾으러 새벽같이 달려가면 따끈따끈한 김밥 한 줄 덤으로 주며 요기나 하고 가라던 이모들이 계시던 곳이다. 아침운동 나온 분, 새벽장 보러 나온 분이 어김없이 거쳐 가던 ‘제일식당’도 대를 이어 손님과 내통하고 있다. 지금도 먹자골목엔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 장보러 나왔다가 옛정이 그리운 아주머니들, 낮술 한잔 들이켜는 아저씨들, 무엇보다 입맛과 정이 그리운 이들이 엉덩이 걸치고 앉아 젓가락을 젓는다. 그때보다 훨씬 깨끗해지고 훨씬 맛난 음식들이 우리를 늘 기다리고 있다.
우리 가족끼리 나들이하거나 집에서 뭘 해먹자 하면 나는 늘 장보는 당번이다. 어머니 집에 있는 바퀴 달린 시장바구니를 끌고 중앙시장을 누빈다. 회는 어디서 사고 튀김이나 파전은 어디에서 살지 훤하다. 두부집도 알고 생선골목도 당연히 잘 안다. 과일, 채소를 펼쳐놓고 오가는 이들을 향하여 한 번씩 “보고 가이소.” “싸게 줄게.”라고 외치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을 보면, 나는 어머니를 보는 듯하여 울컥 눈물이 난다. 그러면 예정에 없던 풋고추ㆍ가지ㆍ배추ㆍ대파ㆍ튀김ㆍ파전ㆍ만두를 산다. “할매, 쪼매만 더 주이소~!”하면 두말없이 한 움큼 더 쥐어준다. 말 안 해도 더 넣어준다. 보기 좋은 포장에 적혀있는 금액으로 에누리 없이 계산해야 하는 대형마트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쇼핑의 즐거움이 있다. 채소들은 싱싱하고 싸서, 아내도 본가에 가는 날이면 꼭 장을 보곤 한다. 그러고 보니 중앙시장에서 옷을 사 입은 기억은 정말 오래 됐다. 교복자율화 세대인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입던 잠바 대부분을 중앙시장에서 사 입었다. 그땐 브랜드도 메이커도 필요 없었다. 그런 중앙시장이다. 나에겐 추억과 낭만이지만 어머니껜 어려운 시기를 견디게 해준 밥벌이의 터전이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힘겨워도 웃으며 즐겁게 정을 사고파는 중앙시장. 2014.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