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김위중 형님이 돌아가셨다. 췌장암이었다. 49살이라는 나이는 너무나 젊은 나이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선배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만난 일은 없었다. 그리고 <경남일보> 입사 동기였다. 1992년 8월 나는 교열부로, 김위중은 편집부로 들어갔다. 다섯 동기끼리 사이가 좋았고 술도 많이 마셨더랬다. 김위중은 입사할 때 결혼을 한 상태였고 딸도 둘 있었다. 차도 있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은 모두 추억이 되었다. 김위중은 <경남일보>를 그만둔 뒤 다른 언론사에서 일하다가 민주당, 경남도청에도 몸담았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투병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자신도 그랬겠지만 우리도 미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1965년 8월생인 그는 2013년 8월에 귀천했다. 지난해 우리는 많이 울었다.1주기인 오늘(정확히는 음력 8월 26일이 기일이다) 옛적 <경남일보> 동료 몇이 모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산소를 찾았다. 올해 찾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그곳을 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부랴사랴 마음을 모았던 것이다. 산소 오르는 길은 잘 정리돼 있었다. 상석에 음식을 차려 놓고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또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빗돌에는 담배에 불을 붙여드렸다. 잘 타들어가는 담배를 보며, 그가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놓고, 그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기사제목을 달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신문 본문과 관련한 삽화를 그리던 그는 미술을 전공한 기자였다. 창원 세코에서 교육박람회를 할 때 둘 다 카메라를 맨 채 만나, 살아가는 어려움과 살아갈 날의 아득함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었다.우리는 얇은 월급봉투에 바쁜 일상 속에서도 정이 있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각자 마음에 스미고 머리에 물들어 있는 추억 한 자락씩을 다 이야기하려면 도대체 며칠이 필요했던 것일까. 한잔한 뒤 거나하게 취하여 김위중 집을 찾아가면 형수님은 냉장고를 죄다 뒤져 이런저런 안주를 차려주었고, 그중 감자튀김은 일등 안주였었다. 김위중은 가정에서는 엄했고 권위주의적이었다, 고 나는 기억한다. 두 딸 밑에 아들을 낳았을 때 매우 즐거워할 수밖에 없던 그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체육대회 할 때 그는 잘 뛰는 선수였으나 등산은 엄청 싫어했다. 등산조와 경내조로 나뉠 때 우리 동기들은 늘 경내조였다.암과 싸우느라 몸은 무척 가벼워졌으나 움직이긴 힘들었다. 그런 그를 보고 우린 눈 둘 곳을 몰라했다. 마지막을 예감한 눈동자엔 추억과 한이 서렸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려워진 그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우린 마음으로 울었었다. 좋았던 시절과 즐거웠던 시절 위로 겹쳐지는 고난과 간난의 그림자를 보며 또 울었었다. 뭐라도 해 줄 게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그는 떠났다. 그로 하여, 아주 오랫동안 안부를 모르던 동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술잔을 나누며 웃고 떠들고 울고 하다가, 문득 울컥하였다. 1년 뒤 오늘 다시 모여 웃고 떠들다가 울컥하여 목울대가 따가워지면 짐짓 안 그런 척하며 술잔을 들었다. 내년에 다시 찾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그가 그토록 누리고 싶어했을 환장할 듯 쾌청한 가을 하늘을 쳐다보았다.
201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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