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피우다가 끊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안 배웠다. 아니, 못 배웠다. 대학시절 <윤양병원> 뒤 <맥전> 호프나, 길 건너 막걸리 집 <청석골>에서 친구들과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심한 구토를 한 뒤 나는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 인생에서 여러 가지 잘한 결정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대개 군대에서 담배를 배운다던데, 나는 다달이 나오는 담배로 인심 좋은 병사가 되어 인기를 얻었다.
아버지는 2011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았고 2012년 9월 돌아가셨다. 나는 ‘담배=폐암’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투병 중 절대 담배를 못 피우시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협박’하여 병원으로 담배를 사 날랐고, 의사ㆍ간호사 몰래 화장실ㆍ베란다에서 담배를 입에 무셨다. 나중엔 의사도 “병이 호전되기는 어려우니 마음이라도 편하게 담배를 태워도 된다.”고 했다. 가족들도 동의했지만, 나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주의료원> 5층 2인용 병실. 불을 훤히 켜 둔 채 나는 보호자용 낮은 의자에 몸을 뉘었다.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가 새벽 4시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어디에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또는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링거 호스로 인하여 서랍에 손이 닿지 않자 몸을 침대 바깥쪽으로 바짝 당기고 비틀어 담배를 끄집어내기 위해 오른손을 힘껏 쭉 뻗으며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의 눈빛과 이마의 주름살을 뚜렷이 보았다. 그것은 삶을 향한 맹렬한 욕망이었다. 절대 금연을 주장하는 셋째 아들이 잠든 틈을 타, 서랍에 있는 담배를 꺼내려고 하신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담배에 대하여 관대해졌다. 의사의 말씀에 일리가 있었고, 간호사들도 베란다 재떨이에 쌓여가는 담배꽁초를 모른 척해 주었으니. 환자옷 입고 담배를 피우시는 분은 아버지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날씨가 좋을 때는 아버지를 1층까지 모시고 가서 말벗도 해 드리면서 담배 태울 시간을 드렸다. 기왕 내려온 김에 한 개비 더 태우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곧 죽어도 담배를 못 끊겠다.”고 하셨고, “담배를 한동안 참으면 천리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다.”고도 하셨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실 때의 표정은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다.
우리 형제들은 산소에 갈 때면 어김없이 담배를 가져간다. 상석 귀퉁이 좁은 틈에 담배를 꽂아놓고 불을 붙여 드린다. 마치 아버지가 담배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듯이 담배는 잘 타들어간다. 어떤 땐 두 개비를 드린다. 그럴 때면, 열대여섯 살부터 일흔일곱 살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하루도 참은 적 없던 담배를 달고 고소하게 잘 드시는 아버지가, 그립고 고마워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 태운 담배는 2년 만에 너댓 갑이 넘는다. 앞으로도 우리는 산소를 찾을 때마다 담배를 사 갈 것이다.
담뱃값 올린다는 뉴스는 나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한 갑에 만 원을 한들, 오만 원을 한들 아버지께 담배를 드리지 않겠는가. 생전 그토록 좋아하시던 것인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래서 담뱃값을 올리겠다는 나라의 판단은 아버지에게서조차 세금을 더 거둬 가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건 비약이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201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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