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
날리는 오동잎 가을은 깊었네.
꿈은 사라지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
내 생명 오동잎 닮았네, 모진 바람 어이 견디리.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
봄이 오면 꽃 피는데 영원히 나는 가네.
불어를 가르치시던 김교탁 선생님은 칠판에 한자를 가로로 쓰고는 노래를 불렀다. 불어선생님이 ‘한문노래’를 부른 것이다. 노래는 홍콩영화 <스잔나>의 주제가이다. 가사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우리는 잠시 눈을 감고 애잔한 곡조로 가슴을 적셨다. 선생님은 다시 우리말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모르긴 해도 속으로 눈물 흘리는 놈도 있었을 것이다. 나도 거기에 속한다. 선생님은, 수업은 무섭게 했지만 꽤 낭만적인 분이셨다. 선생님은 “얼마 전 단체관람한 영화인데도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나?”하시면서 줄거리도 다시 이야기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3년 어느 날이었다.
요즘은 그런 게 아예 없지만, 당시에는 학교에서 권장할 만한 영화를 단체관람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한 학교 학생 전체 또는 한 학년 전체가 한 극장에 몰려가 하나의 영화를 동시에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성룡의 <사형도수>, 스티브 맥퀸의 <타워링>, 리처드 크리나의 <데드십>을 그렇게 보았다. 대부분 영화에 대해 별 느낌이 없다. 그저 수업 안하고 야간자율학습 안한다는 게 좋기만 했다. 대개 체육대회를 하거나 소풍 날, 또는 중간고사ㆍ기말고사 끝날 때 맞춤한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면 단체관람을 하곤 했다. <스잔나>도 그렇게 본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조금 슬프고 우울하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다시피 ‘빤스’이다. 빤한 스토리라는 뜻이다. 당시 한창 주가가 높던 여배우 리칭(李菁)을 주연으로 내세워 관객의 눈물을 좀 짜내보려는 신파조로, 홍콩과 한국 관객을 제법 끌어모았다. 이 영화를 본 뒤 친구들 중에 문학을 꿈꾸는 녀석들은 자기 소설에 백혈병ㆍ뇌암 같은, 자기도 잘 모르는 불치병ㆍ난치병 앓는 여주인공을 자주 출연시켰다. 그만큼 이 영화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스잔나>를 그 뒤 텔레비전에서 한 번 본 적이 있고, 몇 해 전에는 어느 영화광이 전해준 CD에 들어있던 이 영화를 정색을 하고 다시 보았다. 역시 이야기는 진부하고 연기는 (내가 보기엔) 그저 그랬지만, 주제가의 애절한 곡조와 염세적인 가사는 압권이었다. 마음의 거문고가 눈물을 흘릴 만했다.
가을비 그친 저녁, 양 어깨에 붙인 파스는 뜨거운 열을 내뿜는데도 누군가 내 어깨를 옥죄고 있는 것 같은 이 밤, 중년의 긴 강을 힘겹게 건너는 반벗거지가 되어 다시 노래를 듣노라니 30년 전 그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영화는 내가 태어나던 1967년에 만든 것인데, 그것을 감수성 날카롭던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보고, 다시 감수성 돋는 중년에 보고, 어데선가 낙엽 지는 소리가 들릴 듯한 조용한 밤에 정훈희가 부르는 우리말 노래를 듣는다.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일까. 허무한 나그네...
201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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