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난데없이 수업도 안하고 교실 스피커에서 축구 중계가 들려왔다. 몇몇 친구는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멕시코에서 열리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팀이 4강전을 치르고 있었나 보다. 나는 무슨 난리가 난 줄 알았다. 지금 자료를 뒤져보니 8강전에서 우루과이를 물리치고 4강전에서 브라질에 져 폴란드와 3~4위전을 한 모양이다. 결국 4등 했다. 당시 텔레비전 시청률이 83%였다고 하니 가히 놀랄 만하다. 그래도 나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하던 사람이다. 죽기 살기로 오로지 공부만 시키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수업도 포기하고 축구 중계를 듣게 해 주다니….
1998년 6월 프랑스 월드컵이 열릴 때다. 결혼식(6.14.) 전날 멀리 안산에서 아내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광주와 대전에서 후배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여관 두 칸을 잡아놓고 밤새 월드컵 응원을 했다. 결혼을 핑계로 단체 응원전을 한 것이다. 나는 밤샘하는 것은 좋지만 결혼식에 늦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결국 과음한 몇몇은 지각했다. 그렇다고 결혼하는 데 지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축구 그게 뭐라고?”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이기면 어떻고 지면 어때서?”라는 생각도 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때 온 나라가 붉은색 물결이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그날의 함성이 지금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때 여중생 심미선, 김효순 양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부분 국민들은 이 사건을 외면했다. 나중에 촛불시위가 전국을 뒤덮긴 했지만, 그건 축구가 끝난 덕분이었다. 축구 응원하던 열기로 미군 범죄를 규탄했다면 그놈들이 미국으로 빠져나가 무죄 석방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다. 나는 축구보다 위대한 건 없는 것일까 생각했다.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월드컵 이면에 감춰진 피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뉴스나 책은 간혹 나오고 있지만 작은 공 하나에 쏠린 지구 사람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지는 못한 것 같다. 2014년 지금 우리나라엔 월드컵보다 수만 배 중요한 일이 많은데도 월드컵은 블랙홀이 되는 것 같다. 국무총리 후보, 교육부장관 후보,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고발당한 국회의원 등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더 많이 필요한 시기이다. ‘세월호’ 희생자 12명은 차가운 바다 속에서 몸과 마음이 분해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축구 그게 뭐라고 우리는 이러는 것일까. 우승을 한들, 꼴찌를 한들 그게 뭐라고? 2014. 6. 18.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디오 (0) | 2014.08.20 |
---|---|
억울한 일 (0) | 2014.07.02 |
복분자주 (0) | 2014.06.18 |
복어 (0) | 2014.06.14 |
우리 시대의 누런 얼굴 (0) | 2013.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