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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억울한 일

by 이우기, yiwoogi 2014. 7. 2.

그날 내가 그 풍개나무 밑에서 한 행동은, 친구와 꼴 베다가 바닥에 떨어진 풍개 몇 개 주워 먹은 것밖에 없다. 그것마저 잘못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앞뒤 막힌 풍개나무 주인 아재가 말하는 것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풋풍개를 마구 따 먹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억울한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까 5학년이었을까. 친구와 나는 마을 앞산 밑 자드락밭에 펼쳐져 있는 풍개나무 밑으로 꼴 베러 갔다. 거긴 연둣빛 생생한 부드러운 잡풀들이 무릎까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 소가 먹으면 참 좋아하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

푸른빛 풀 사이에 빨갛고 노란 풍개가 더러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을 어쩌겠나. 익어서 떨어진 게 아니라 떨어져 익은 풍개. 그런 건 더 달다. 그래서 우리는 눈치 볼 것도 없이 몇 개 주워 먹었다. 얼마 뒤 저 멀리서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남자 어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사람이 풍개밭 주인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았다. 우리는 풍개밭 주인 아재가 자기 밭풀을 베어간다고 뭐라는 줄 알았다. 소 키우는 집이라면 누구든 탐낼 만한 풀이었으니까. 우리는 낫과 비료 부대만 들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 베던 풀은 내던져 버렸다. 그러면 안 따라올 테니까. 예순쯤 되었을 아재가 타잔보다 빠른 우리를 잡을 수 있었겠나.

우리는 속으로 , 베어 놓은 풀을 그 아재가 잘도 가져갔겠네.”라며 저 멀리 산을 돌아 저수지 밑까지 갔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집으로 갔다. 그러고선 그 일은 까먹고 밥 잘 먹고 잠 잘 잤다.

다음날 학교 갈 때였다. 학교로 가는 어귀에서 밭주인과 딱 맞닥뜨렸다. 같이 꼴 베던 친구도 붙들려 있었다. 도망갈 생각도 튈 생각도 못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변명거리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는 미안합니다.”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고개 푹 숙이고 먼저 사과를 했다. 머릿속엔 베다가 버리고 간 꼴이 떠올랐다.

주인 아재는 내 머리에 굴밤을 세게 몇 대나 때리면서,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다 보고 동네 아지매, 아재들이 다 보도록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이놈들이, 그래 다 익지도 않은 풍개를 따 먹으면 우짜노!” “물어주끼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쪼깬한 놈들이!” 이러는 게 아닌가. 나는 떨어진 풍개를 몇 개 주워 먹긴 했지만 죽어도 나무에 열린 걸 따 먹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사과를 한 주제에 무슨 변명을 댈까 싶어 계속 얻어맞기만 했다.

세상 살면서 지천명 가까이 되어가다 보니 억울해도 할 수 없고, 변명 댈 여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꾸지람 듣는 일이 많음을 알겠더라. 내 잘못 아니라고 말하는 게 외려 부끄럽고 민망해지는 일, 실실 웃고 나면 조금은 허허롭지만 그게 오히려 잘했다 싶은 일이 많음을 느끼겠더라.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인지. 201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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