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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우리 시대의 누런 얼굴

by 이우기, yiwoogi 2013. 12. 24.

늦잠을 자는 법이 없는 남자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맛있게 식사를 한다. 양치를 하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 입는다. 넥타이는 와이셔츠·재킷 색깔과 잘 맞춰 고른다. 곁에서 아내가 코디를 해주기도 하고 혼자 고르기도 한다. 대문을 나설 때는 귀여운 아이들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아내와 가볍게 포옹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이 회사에서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직장인으로 대우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월급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늦게 귀가하는 일도 거의 없고 술을 마시는 날도 없다. 언제나 말쑥하고 깔끔한 외모는 더욱 신뢰를 안겨 준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사라졌다. 실종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내는 그날 아침 남편 출근 후 외출을 했다. 어느 허름한 건물 앞을 지나다가 2층 창문으로 우연히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창밖을 내다보던 누런 얼굴의 어떤 남자가 !”하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그날 저녁에 남편은 귀가하지 않았고 그다음 날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그 비명소리와 남편의 실종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녀는 허름한 건물 2층 창문에서 본 사람이 그 동네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거지가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 거지가 남편을 잡아가둬 놓고는 자신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 것 같다고, 셜록 홈즈에게 진술했다. 남편은 누구에게 원한을 사거나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명탐정 홈즈는 그리 어렵지 않게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다. 동네에는 지나가는 코흘리개 애들도 다 아는 거지가 있었다. 찌그러지고 누런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 꾀죄죄하고 냄새 나는 옷차림 등 누구나 가까이하길 꺼리는 거지다. 그래서 유명한 거지다. 사람들은 저 멀리서 동전을 던져 주거나 간혹 교양 있는 부인들은 지폐를 꺼내 거지에게 건네곤 했다. 식당에서는 돈도 받지 않고 음식을 내줬다. 하지만 그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어디를 돌아다니고 얼마나 버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홈즈는 그 거지가 그녀의 실종된 남편임을 밝혀낸다. 그는 허름한 집 2층에 세를 얻었고 거기서 옷을 갈아입고는 태연하게 거지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도 옷을 갈아입으며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것이다. 그러고선 아내가 자기를 알아본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걱정이 되어 집에조차 가지 못한 것이다. 중학생 시절 읽은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 중 누런 얼굴이라는 작품이다. 오래 되어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그렇다.

나는 몇 년 사이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편에게 자꾸만 마음이 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집 밖, 즉 직장에서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당하는 일을 가족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대부분 남자들의 심리 아닐까. 19~20세기에 걸쳐 살았던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 경의 생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읽었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에 부딪히며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하고 어쩌다 화장실에서 울기도 하는 우리 시대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추리소설 속의 거지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월급 주는 사장에게 고개 숙여야 하고 중간 관리자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고객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직장인의 삶은 한 푼 줍쇼!” 하는 거지와 얼마나 다를까. 퇴근 후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노래방 가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뒤,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다시 근엄하고 점잖은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어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은 소설 속 누런 얼굴과 얼마나 다를까. 여성 직장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있겠는가.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보여주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전장 같은 직장의 일상. 그래도 아주 간혹은 자랑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라 믿고 애써 즐겁게 일하는 우리 시대 직장인들의 누런 얼굴에 하얗고 빨간 웃음꽃 한 송이 전하고 싶다. 경남도민신문 201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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