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한잔하고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마당을 걷는다. 가로등은 어둠을 물리칠 힘이 없어 보인다. 집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는 웃음과 행복이 묻어난다.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참는다. 우리 집 현관을 통과할 때까지는 흐트러진 모습을 누구에게 들키지 않는 게 좋다. 문득 하늘을 보면 구름이 달을 가렸다. 서늘한 가을바람은 소리 없이 내 품속으로 파고든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쓸쓸함이 몰려든다. 계절의 변화는 한 치도 어김이 없어서 어느새 가을의 한 가운데 나는 서 있다. 생각해 보면, 가을을 느끼고 즐길 겨를이 없었다. 중년이라서 그런가.
한창 젊은 시기가 지난 40대 안팎의 나이를 중년이라고 한다. 올해 마흔일곱 살인 나는 중년이다. 중년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이마가 올라가고 배가 나온다. 흰머리가 나고 수염도 흰색이 보인다. 피부는 거칠어진다. 팔자걸음을 걷는 이도 있다. 움직임은 더뎌진다. 저녁잠이 많아지고 아침잠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병원 갈 일은 많아진다. 안경을 끼는 사람도 많다. 아직 한창 열심히 일하고, 책임도 어느 시기보다 무거울 때이다. 자녀들은 중고등학생쯤 되어 돈이 많이 든다. 동창회 같은 모임도 많을 시기다. 자연스레 술도 많이 먹게 된다. 계절로 치면 가을이라고 할까. 자연의 가을은 아름답고 풍요롭다. 과일과 곡식이 익고 산과 들은 형형색색 고운 자태를 뽐낸다. 인생의 가을도 아름답고 풍요로울까.
모두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20대 청년 때는 세상 모든 일을 다 바꿀 수 있을 듯하다가, 30대 장년 때에는 굳이 다 바꿀 필요가 있겠나 싶다가, 40대 중년에 들어서면 세상을 바꾼들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된다. 친구들을 만나 정치 이야기, 먹고 사는 경제 이야기, 지역 발전 이야기도 하지만 투표할 때가 아니면 공허함만 남는다. 나와 내 가정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일이 많다. 욕을 해줘야 할 때도 참아야 하고 흥이 나지 않아도 노래를 불러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걸 훌훌 벗어던지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꾹꾹 눌러놓아야 한다. 돈 때문에 벌벌 떨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주머니 속에 최소한 대리운전비가 있는지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카드 대금이 얼마나 나올지도 걱정된다.
일요일 아침 일찍 찌개를 끓이고 밥상을 차린 뒤 아내와 아들을 깨운다. 노고단에 가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설레어하는 아내와 조금 귀찮은 듯한 아들을 태워 출발한다. 노고단에는 많은 차들이 이미 주차장을 메웠고 알록달록 차려입은 나들이객과 울긋불긋 나무들이 가을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깔깔깔, 하하하, 호호호, 허허허 웃는다. 어린애도 있고 머리 하얀 할아버지도 계신다. 단풍보다 훨씬 아름답다.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노고단대피소에서 마주앉아 웃으면서 김밥을 먹고 감을 깎아 먹는다. 따뜻한 커피도 마신다.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김치~”라고 하지 않아도 입가에 미소가 돈다. 내려오는 길엔 달궁마을에서 지리산흑돼지구이 한 접시에 동동주도 한잔한다. 나물이 아주 맛있다. 목욕탕에 들러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집에 있었으면 하루 종일 뒹굴뒹굴 텔레비전 보다가 자다가 먹다가 했을 일요일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피곤함은 없고 가족에게 미안함은 적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어디든 가자고 다짐한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이에 잊어버린 나와 나의 가족에게 나의 삶과 나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고 싶어진 것이다. 나의 중년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보내고 싶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겠지만. 경남도민신문 2013.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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