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등잔불 아래에서 공부를 했다. 저녁밥을 먹은 뒤 아버지, 어머니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칸이 큼직한 공책에 한글을 쓰고 산수 문제를 풀었다. 어른들은 어두워서 글자가 잘 안 보인다 하셨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일찍 불을 꺼야 했고, 나는 국어책 읽는 것이 재미있었으나 하는 수 없이 자야 했다. 4학년 때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동네 한 가운데에 전봇대 여러 개가 줄지어 섰고 기술자들은 전깃줄을 이었다. 전깃불이 켜진 환한 방바닥에서 아버지는 “글씨를 잘 쓴다.”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 전기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부모님은 전기요금 내는 것을 “전기세 바친다.”고 하셨다. ‘요금’을 ‘내는’ 게 아니었다. 전기의 위대함이나 고마움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6학년 초 진주로 이사를 와서 텔레비전을 샀다. 시골에선 남의 집에서 친구 어머니로부터 “발 냄새 난다, 땀 냄새 난다.”는 지청구를 들어가면서 ‘타잔’이나 ‘홍수환 권투’를 보곤 했는데, 이제 집에 텔레비전이 생긴 것이다. 정말 재미있고 또 재미있는 게 텔레비전이었다. 냉장고도 샀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던 라디오를 버리고 전기를 꽂아 쓰는 라디오도 새로 샀다. 그 시절 전기는 우리에게 문명의 축복을 일깨워주는 고맙고 또 고마운 하늘의 선물이었다.
전기 없는 삶은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전기제품을 생각해 본다. 에어컨, 냉장고, 김치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컴퓨터, 프린터, 라디오, 전화기, 휴대폰, 카메라, 선풍기, VCR, 스탠드, 커피포터, 전자레인지, 청소기, 면도기, 가습기, 헤어드라이어, 다리미, 가스보일러, 전기장판, 그리고 천장의 전등들. 참 많기도 하다. 직접 전기를 연결하여 쓰거나, 충전하여 쓰거나 하여튼 전기 없이는 작동이 안 되는 문명의 이기(利器)들이다. 이러한 물건들 가운데 몇몇은 자주 안 쓰거나 거의 안 쓴다. 하지만 대부분 나날살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만약 정전이 된다면 냉장고 위칸에 얼려져 있는 것들이 대번에 녹아내릴 것이고, 김치냉장고 안의 김치는 무척 빨리 발효해버릴 것이며, 휴대폰도 있으나마나한 물건이 될 것이다. 보일러는 가스를 연료로 쓰지만 전기가 없다면 이마저 소용이 없다. 전기만큼 고마운 게 있을까 싶다. 공기와 비교할까, 물과 비교할까.
그리고 요즘은 전기가 다른 면에서 고맙다. 한국전력은 전기요금을 11월 21일부터 가정용은 2.7%를 올렸다고 한다. 우리 집 한 달 전기요금은 3만~4만 원이다. 나름대로 절전을 열심히 실천한 결과이다. 친구 두어 명과 삼겹살 안주 삼아 소주 한잔하면 5만 원 이상 나온다. 다달이 내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회비는 대략 5만 원 정도이다. 케이블TV와 인터넷 사용료는 한 달에 3만 원이 조금 넘는다. 이렇게 보면 고마움을 물과 공기에 견줄 만한 전기 한 달 사용료로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싶다. 그런데도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하니 우리는 안 쓰는 전기 코드를 뽑거나, 출근할 때 안 끈 등이 없는지 한 번 더 살피게 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절전방법은 모두 찾아봐야 하게 됐다. 이러한 것들은 어찌 보면 전기요금 절약 대책이라고 하겠지만, 생각을 넓혀 보면 나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고 또 우리 사회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고마울 수밖에.
가정용 전기요금 2.7% 올리고 산업용 전기요금 6.4% 올리는 것의 이면에 담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여기서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건설 문제, 밀양 송전탑 문제, 한국전력의 적자와 고임금 문제,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하는 도덕적 해이 문제, 산업용 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싼 이유 같은 것에 대해 전에 없던 관심이 쏠린다. 언론 보도도 더 자세히 챙겨보게 된다. 그리고 전기요금 인상을 신호로 앞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물가가 올라갈 것이므로,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니 전기가 더없이 고마울 수밖에. 경남도민신문 2013. 11. 25.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어 (0) | 2014.06.14 |
---|---|
우리 시대의 누런 얼굴 (0) | 2013.12.24 |
아름답고 풍요로운 중년을 위하여 (0) | 2013.11.23 |
책 읽는 버릇 (0) | 2013.11.23 |
내 마음을 살피는 성묘 (0) | 2013.09.17 |